카운트다운 사순절
사순절 카운트다운 (시 39:4-7) 149장
“저는 뒤끝이 없는 사람입니다. 작은 일에 가끔 폭발을 하지만, 금방 풀어버리기 때문 뒤는 없습니다. 마음에 두고 꿍하고 있지는 않지요. 1분도 안 걸려 그 사람하고 그 자리에서 다 툭툭 털어버리고 끝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라고 말하며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 힘들어 하는 사람이 카운셀러를 찾았습니다. 괜히 겉으로 안 그런 척 하지만 속으론 꽁하게 있는 사람들보단 화가 났어도 오래 가지 않고, 싸우더라도 모든 것을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자신이 훨씬 더 좋은 성격 아니냐는 것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카운셀러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정중히 말합니다. ”엽총도 그렇습니다. 오래 안걸립니다. 한 방이면 끝나지요.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그래서 총을 쏘기 전에는 카운트를 하는 겁니다. 하나둘 셋“ 카운트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결과를 예측하기도 하고, 준비하기도 하고 점검하기도 합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기에 카운트는 필수적입니다.
저는 수에 대해서 매우 우둔한 편입니다. 복잡하게 배열되어 있거나, 단위가 높아지면 머릿속이 멍해집니다. 그래서 복잡한 수보다는 단순한 수에 친밀감을 느낍니다. 실제로 제가 절실하게 느끼는 것도 결코 큰 수가 아닌 작은 수 앞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절실함은 수를 더해 갈 때보다는 역으로 내려갈 때 더욱 심각해집니다. 수가 있는 이상 모든 것은 유한합니다. 그러니까 숫자에서 탈출하는 자만이 꿈꾸는 영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타의든 자의든, 우리는 제로를 향해 나아갑니다. 유한한 목숨을 지녔기에, 그리고 모든 것은 유한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완벽한 제로 상태에 이르게 되면 숫자에서 탈출한 것 같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게 있어 그런 첫 경험은 군 생활 제대를 앞두고 하루 하루 카운트하며 지내다 마침내 전역신고 후 집으로 돌아오는 그 시간이 가장 절정의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은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밀린 숙제를 끝내는 때도 가끔 경험하긴 했지만 그런 상태는 실로 한 순간에 있을까 말까 어느새 저는 또 다른 숫자에 골똘히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먹거리가 귀하던 어린 시절에 건빵이나 알사탕은 매우 맛있고 인기있는 간식이었습니다. 어쩌다 먹을 게 생기면 부모님은 형제들이 많던 시대라 싸우지 않도록 늘 골고루 나누어 주곤 하셨습니다. 그때는 그게 너무 귀해 깨물어 먹지도 못하고 입에 넣고 오물오물하며 남은 수를 헤아리며 아껴 먹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왜? 하나씩 꺼내어 먹을 때마다 먹은 사탕의 숫자를 헤아리는 것이 아니고, 봉지 속에 남아 있는 사탕의 숫자를 헤아렸을까요? 먹은 것이 더 많아지는데도 아홉 개, 여덟 개 수가 줄어드는 남은 개수를 헤아렸던 것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아름다움, 젊음, 기쁨, 행복, 사랑... 말만 꺼내도 단맛이 우러나는 그런 것들은 손에 쥐어졌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사실상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것을 일찍 깨달은 때문일까요? 그런데 오히려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괴로움과 고통의 순간들은 어찌 그리 더디고, 밤새 뒤척이며 지새우는 불면의 밤은 얼마나 길던가요? 저는 요즈음, 시간의 흐름이 아무 것도 이룬 게 없어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 감사합니다. 잘 다스려지지도 않고, 꼼짝하지도 않는 아픔들을 다독거리면서 그 무게를 조금씩 가볍게 해주는 세월, 그 손길에서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카운트다운하며 남은 날을 살아갑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삼킵니다. 불꽃보다 더 이글거리던 격정, 환희, 분노들, 그리고 바위보다 더 무겁게 짓누르던 절망, 고통, 슬픔들도 시간이 지나면 끝이 납니다. 결국 우리들 삶의 흔적이란, 시간의 벌판에 잠시 어른거렸다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유한한 목숨들이 영원의 문으로 들어설 때, 가장 가벼운 몸짓으로 날아들 수 있도록, 시간은 친절하게도 카운트다운을 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요즘 상당한 기간이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은퇴할 날을 계산하는 제 모습을 종종 보면서 깜짝 놀라기도 하고 벌써라는 생각에 허무해지기도 합니다. 저보다 선배님들은 더하시겠지만 아마도 은퇴 후의 생활이 염려되거나 불안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은퇴 후의 생활이 적게 남아서가 아니라 갈수록 많아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아님 어쩌면 우리 모두는 유한 삶을 살기에 어쩔 수없이 없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카운트다운하며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작은 일에는 따지고 계산하면서도 실상 우리의 생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사는 것을 발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두 가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첫째는“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4절)”두 번째는“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절)”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을뿐 아니라, 인생의 카운트다운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이 이미 작동된 시한폭탄의 타이머를 멈추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대개 카운트다운 되던 그 타이머를 멈추고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하지만 인생의 카운트다운은 누구도 멈출 수 없습니다.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인생의 타이머는 이미 카운트다운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인생의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존재들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순간 우리는 벌써 카운트다운 속에 있습니다. 이 긴장감 속에서 우리들은 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두고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며 경건과 절제의 생활을 통해 주님과 더 가까이 하는 기간임과 동시에 죽음이란 절정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절정의 상징입니다. D-13일 앞으로 남은 사순절기간입니다. D-11일 십자가 사건 아니 죽음까지 남은 시간입니다. 기실 우리의 삶은 날마다 죽는 삶이긴 하지만 십자가의 체험없이는 영원한 시간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주님 앞에 겸손히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지 못하고 세상의 낙에 취해서 한발은 세상에 걸치고 한발은 예수님께 걸치는 우리의 이중성을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 둘 분초를 헤아리는 카운트다운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문제는 지켜보기도 하고 관찰도 하지만 참여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발코니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발코니에서 지켜보기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지켜보는 것으로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희망은 바라보는 것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바라보는 것은 목표설정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오히려 부딪쳐야 합니다. 모세가 홍해에, 여호수아가 요단강에 발을 들여 놓은 것처럼 부딪쳐야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큰소리만 치는 게 아니라 물멧돌을 던져 부딪치듯 우리는 십자가와 부딪쳐야 합니다. 직접 참여하고 더 나아가 헌신해야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또한 그런 사람만이 은혜의 깊은 맛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은 그것들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사순절은 카운트다운되는 시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죽음 예행연습입니다. 인생은 연습이 없지만‘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라고 고백한 사도바울처럼 사순절을 통해 십자가를 체험하고, 죽음 직전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심정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본디 카운트다운은 인공위성 우주선 등의 로켓 발사 준비 작업을 정확하게 진행시키기 위하여 발사 예정시간을 기준으로 해서 거꾸로 시간을 읽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초(秒)단위로 진행하게 되므로 '초읽기'라고도 합니다. 거대한 로켓을 발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복잡한 준비 작업이 수반되므로 그 절차를 빈틈없이 진행하기 위해 준비 작업을 초단위로 단계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인생도 철저한 준비를 위해 초읽기에 들어가야 합니다. 지난주 국립암센터 윤영호 박사팀은 서울대병원 등 11개 대학병원에서 18세 이상 말기암환자 481명과 가족 38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매일경제 2010년 3월16일) 그 중 하나가 환자가 말기임을 모르거나, 상태가 악화돼 짐작으로 말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 환자보다 의사나 가족에게 직접 들은 환자의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기능과 전반적인 삶의 질이 더 좋았으며 피로나 통증, 식욕부진 등도 더 적고, 삶의 질이 긍정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생을 계수하는 사람의 삶의 질이 더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 가족이야기를 한다는 게 좀 그렇습니다만 가친은 작년부터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 요양 중에 계시는데 최근들어 주변정리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봅니다. 통장과 집문서를 정리하고, 장기 기증서약서를 확인 시키려는 듯 보여주시며 이제 갈 때가 된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데 너무 가슴이 아리고 아팠습니다. 누구나 한번은 왔다가 가는 길이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가족일 때는 남다른 감정이 북받쳐 옵니다. 아버지의 급작스런 행동에 당황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가는 줄 모르고 가는 것보다 서서히 때를 알아가며, 돌아 갈 곳이 있다는 종말론적 삶을 예비하는 모습이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카운트다운 그것은 우리 날을 계수한다는 것이며, 남은 인생을 계산해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보다 철저한 준비를 한다는 뜻입니다.
카운트다운은 시한부 인생임을 고백하는 것이며, 삶의 지혜입니다. 수험생이 카운트하듯, 로켓발사 카운트하듯 인생을 준비하고, 이 땅만이 아닌 영원힌 본향을 향한 겸손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끝까지 성실한 삶으로 최선을 다한다는 각오입니다.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은혜의 삶을 사려는 서약입니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깨어 기도하는 신부로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특히 사순의 카운트는“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고백하는 순종의 삶입니다. 아직은 앙상한 양팔 벌려 빈손 치켜들고 기도하는 나무처럼,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도하며 새순을 키워가듯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화해와 용서를 구하며 초읽기에 들어가는 은총의 사순절이 되어지길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합니다.(목포정명여자중학교 2010년 3월 22일 교직원예배:윤삼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