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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진 것의 소중함 / 신달자
물음표와 느낌표
2009. 3. 18. 10:03

가진 것의 소중함
사람들은 이상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러면서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늘 애석해한다. 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가지고 있는 것에는 무감각할 정도로 덤덤하고, 내 것이 아닌 것에는 모든 핑계를 대며 스스로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없는 것은 불행하다고 단정한다. 그렇다고 단정하니까 불행해진다.
며칠 전 연구실 정리를 했다. 17년 간의 교직 생활을 끝내는 정년을 맞아 연구실을 비워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가장 어렵고 귀찮은 일은 책을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책을 옮기는 일도 쉽지 않아 학생들에게 조금씩 나누어주었다. 그러기 위해선 중요한 책을 고르고 내가 반드시 가져가야 할 책들을 다시 고르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귀찮았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다가 잠시 남자 교수들이 했던 말을 생각했다.
퇴직하면서 책 속에 숨겨 두었던 비상금을 찾느라 종일 책과 씨름했다는 동료 교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얼마나 웃었던가. 생각지도 않았던 수표 몇 장을 책 속에서 발견했을 때는 헤어졌던 애인이나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난 듯 눈물 날 지경으로 반갑더라는 어느 교수의 이야기가 생각나 혼자 쓸쓸히 웃었다.
적어도 나는 책 속에 비상금을 숨겨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데 이상하게도 어쩌면 기억은 없으나 책 속에 수표 몇 장이 잠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겨울 코트를 처음 입었을 때 주머니에서 만원짜리 지폐를 발견하듯이 말이다.
어차피 해야 할 일에 재미를 붙여 책을 뒤적이기도 하고 털어도 보고 하면서 책을 고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책 속에서 친구들의 전화번호가 나오기도 하고, 밥을 먹고 받은 영수증이며 옷을 사고 받은 영수증이 나오기도 했던 것이다. 책을 읽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던지 급히 써서 끼워 놓은 시 구절의 메모도 발견되었다.
그러다 편지 한 통을 책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 생의 잊었던 한 부분을 복원시키는 그런 편지였다. 어느 시집을 뒤적이다가 발견된 그 한 통의 편지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기억에서조차 없었던 남편의 편지였다. 놀랍고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편지가 왜 그 시집에 꽂혀 있게 됐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우리는 은평구에서 20년을 살고 한강이 보이는 강변으로 이사를 했을 때 집 문제로 크게 다투었는데 그 뒤에 미안하다고 쓴 남편의 편지였다. 남편은 그 편지를 쓰고 7년쯤 더 살다가 먼 곳으로 가버렸지만, 나는 그 편지를 너무나 완벽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편지의 내용은 따뜻했다. 다시는 싸우지 말자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세 번이나 쓰고 있었다. 물론 우리는 그 뒤에도 싸우면서 살았지만 이 세상에 없는 남편의 편지를 읽고 다시 읽으며 어느 남자 교수가 기억에도 없는 수표 몇 장을 찾은 기쁨보다 특별하게 가슴이 따뜻해 오면서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혼자 소리내어 하고 있었다. 내가 미안해요.
결국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에게 왜 더 살갑게 해주지 못했을까, 왜 남편의 이런 편지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남편이 내게 해 주지 못한 것만 늘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왜 늘 나만 잘했고 그만 잘못했다고 말하며 살았을까….

그 편지는 바로 남편의 이러한 마음은 잊어버리고 해 주지 못한 부분만을 키우면서 투덜대고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사실은 우리가 가진 것은 생각보다 많을지 모른다. 그렇다. 좋은 것은 잊어버리고 나쁜 것만 기억하고 있어서 불만은 크고 만족은 그 얼굴조차 볼 수 없었는지 모를 일이다.
옷을 정리하거나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다 보면 내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이 나오는 경우가 더러 있다. 자기 것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면서 없다고만 하는 것은 아닐까. 자기 것이 자기를 기다리는 사실은 아예 잊어버리고 새것만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무조건 없다고, 나는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도 찾으면 많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언젠가 신입생들에게 자기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모조리 시험지에 적어 내라고 과제를 낸 적이 있다. 처음에는 당황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다 서서히 학생들은 내 질문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아버지, 형제, 친구 아무개, 고향, 학교, 좋아하는 운동 선수, 좋아하는 책…. 그리고 세부적으로 칫솔, 숟가락, 가방, 지갑, 사랑하는 추억 그리고 꿈과 희망이 있으며 드디어 살아 있는 마음이 있다고 적어 내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그렇게 적어 내면서 아랫부분에 메모를 남겨 놓기도 했다. ‘나도 이렇게 적고 보니 가진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글을 쓴 학생들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면서 우선 내가 가진 것의 소중함을 알아야 우리가 생각하는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지금 부자라고 해서 내 것을 업신여기면서 내가 가진 것을 얕보아서는 결코 장래를 밝게 바라볼 수 없다는 말과 지금 내가 가진 여건과 현실을 사랑할 줄 알아야 우리들의 희망도 우리를 알아본다는 말을 강조했던 그 강의도 이제 끝이 났다.
그런데 왜, 연구실을 정리하면서 조금은 쓸쓸한 내게 남편의 편지가 발견되었을까?
어느덧 정년을 맞아 마지막 정리를 하는 내 마음의 그늘을 밝혀 주기 위해 남편의 편지는 가장 외로운 시간에 내게로 꿋꿋하게 걸어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 우리들의 자산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내가 가진 것을 좀더 대접하고 아끼노라면 불평도 적어지고 좀더 따뜻해지고 오늘 이 시간을 사랑하며 살 수 있지 않겠는가.
- 신달자 / 시인 / 문화일보 2009.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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