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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1월의 시선

물음표와 느낌표 2008. 11. 5. 09:24

11월의 시선

 

 

 

 

 

 

 

11월의 시

 

      <임영준>

 

모두 떠나는가

 

텅 빈 하늘아래
추레한 인내만이
선을 긋고 있는데
훌훌 털고 사라지는가

 

아직도 못다 지핀
詩들이 수두룩한데
가랑잎더미에
시름을 떠넘기고

 

굼뜬 나를 버려둔 채
황급히 떠나야만 하는가

 

 


내가 사랑하는 계절

 

             <나태주>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
11월이다
더 여유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개끔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時祭 지내려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해
콧노래 함께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틀걸음이 들어 있다

 

어린 형제들이랑
돌담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對送 꾸러미를 기다리던
해 저물녘 한 때의 굴품한 시간들이
숨쉬고 있다

 

아니다 황토 흙 속에는
끼니 대신으로 어머니가
무쇠솥에 찌는 고구마의
구수한 내음새 아스므레
아지랑이가 스며 있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계절은
낙엽 져 나무 밑둥까지 드러나 보이는
늦가울부터 초겨울까지다
그 솔직함과 청결함과 겸허를
못 견디게 사랑하는 것이다

 

 

 

다시 11월 

   

      <박영근>

 

꽃 떨어진 그 텅 빈 대궁에 빗물이 스쳐간다

 

이제 나를 가릴 수 있는 것은 거센 바람뿐

 

시 한 줄 없이 바람 속에 시들어

 

눈 속에 그대로 매서운 꽃눈 틔우리

 

 

 

11월       

 

  <고재종>

 

갱변의 늙은 황소가
서산 봉우리 쪽으로 주둥이를 쳐들며
굵은 바리톤으로 운다

 

밀감빛 깔린 그 서쪽으로
한 무리의 고니가 날아
봉우리를 느린 사박자로 넘는다

 

그리고는 문득 텅 비어 버리는 적막 속에
나 한동안 서 있곤 하던 늦가을 저녁이 있다

 

소소소 이는 소슬바람에
갈대숲에서 기어나와
마음의 등불 하나하나를 닦아내는 것도
그때다

 

 

 

11월       

 

   <나희덕>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에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넣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11월        

 

   <박영근>


바람은
나무들이 끊임없이 떨구는 옛기억들을 받아
저렇게 또다른 길을 만들고
홀로 깊어질 만큼 깊어져
다른 이름으로 떠돌고 있는 우리들 그 헛된 아우성을
쓸어주는구나

 

혼자 걷는 길이 우리의 육신을 마르게 하는 동안
떨어질 한 잎살의 슬픔도 없이
바람 속으로 몸통과 가지를 치켜든 나무들

 

마음 속에 일렁이는 殘燈이여
누구를 불러야 하리
부디
깊어져라
삶이 더 헐벗은 날들을 받아들일 때까지

 

 

 

11월       

 

    <이외수>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 비우고
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
독약 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은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상처 깊은 눈물도 은혜로운데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

 

 

 

11월

 

   <조용미>

 

한밤
물 마시러 나왔다 달빛이
거실 마루에
수은처럼 뽀얗게 내려앉아
숨쉬고 있는 걸
가만히 듣는다

 

창 밖으로 나뭇잎들이
물고기처럼
조용히 떠다니고 있다
더 깊은 곳으로

 

세상의 모든 굉음은
고요로 향하는 노선을 달리고 있다

 

 

 

11월

 

   <안은숙>

 

내 안 깊은 우물 바닥까지 다 비워낸
물기 없는 내가 스산해서
지는 해의 붉디붉은 신열 저 만큼에 두고
한참을 서 있는 11월
오래 앓던 정신의 밀도도 내려놓고
생의 속도마져 지워가며 낮아지는
겸허히 서늘한 계절
순한 손이 깊숙이 고요를 들이고
깊숙한 고요로 잠기고

 

 

 

십일월

 

      <이정림>
 
바람에
낙엽이 흩어지고 또 날린다.
찌푸린 하늘은 할미꽃
떨어져 날리는 잎사귀마냥 모두들 바쁘다.
푸시시한 얼굴에 초겨울 그림자가 스치고
쪼달림의 모습 모습이다.

 

잘 익은 밤나무
밤톨 한 알 없이 다 털리고
주황색 감나무에
달랑 까치밥 한 알뿐이다.

 

뿌연 하늘이 멍하니 내려 보이는 빈 벌판
허허로운 허수아비
심장도 멈추었다.

 

소용없는 바람만이 차가워서 흐느끼고
코스모스와 들국화도 흑흑 따라서 운다.
멀거니 할미꽃도 운다.
모두들 앙상하게 남아서 운다.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나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나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11월

 

    <이수희>

 

내 그림자가
고집을 피우고
슬그머니 꼬리가 무딜까봐
감나무 몇 잎이
가지를 놓지 못합니다
시간의 그늘을 저만치 두고
비릿한 눈물마저 마른
하늘 끝마저 멉니다
그가 내민
연서를 따라가다가
벌레먹은 낙엽이 되고
휑하게 길어진 돌담길
긴장한 상념도 움츠리며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걸립니다
땅위를 걷는 모든 각진 마음들이 뒹굴어
제 가슴만 헐어내고
제 허무함만 세우고
그래도 그의 가슴마다 기슭마다
세상의 뿌 리를 더 환하게
달고 있습니다

 

 

 

11월에

 

      <이해인>

 

나뭇잎에 지는 세월
고향은 가까이 있고
나의 모습 더없이
초라함을 깨달았네

 

푸른 계절 보내고
돌아와 묵도하는
생각의 나무여

 

영혼의 책갈피에
소중히 끼운 잎새
하나 하나 연륜 헤며
슬픔의 눈부심을 긍정하는 오후

 

햇빛에 실리어 오는
행복의 물방울 튕기며
어디론지 떠나고 싶다

 

조용히 겨울을 넘겨보는
11월의 나무 위에 연처럼 걸려 있는
남은 이야기 하나

 

지금 아닌 머언 훗날
넓은 하늘가에
너울대는 나비가 될 수 있을까

 

별밭에 꽃밭에 나뭇잎 지는 세월
나의 원은 너무 커서
차라리 갈대처럼
여위어 간다

 

 

 

11월의 나무처럼         

 

                     <이해인>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에요

 

받은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은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고운 새 한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
갈 길을 가야겠어요

 

 

 

11월의 노래     

 

        <김용택>

 

해 넘어가면
당신이 더 그리워집니다
잎을 떨구며
피를 말리며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이 그리워
마을 앞에 나와
산그늘 내린 동구길 하염없이 바라보다
산그늘도 가버린 강물을 건넙니다

 

내 키를 넘는 마른 풀밭들을 헤치고
강을 건너
강가에 앉아
헌옷에 붙은 풀씨들을 떼어내며
당신 그리워 눈물 납니다

 

못 견디겠어요
아무도 닿지 못할
세상의 외로움이
마른 풀잎 끝처럼 뼈에 스칩니다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에게 가 닿고 싶은
내 마음은 저문 강물처럼 바삐 흐르지만
나는 물 가버린 물소리처럼 허망하게
빈 산에 남아
억새꽃만 허옇게 흔듭니다

 

해 지고
가을은 가고
당신도 가지만
서리 녹던 내 마음의 당신 자리는
식지 않고 김납니다

 

 

 

11월이 가는 갈밭 길에서

 

                                 <김동규>

 

처음에는 문득, 바람인 줄 알았다
娼婦의 賣笑같은 까칠한 소리로
살과 살을 비벼대다 드러눕던 몸짓,
바람 가는 길목을 지키고 섰다가
혼절하는 몸소리로 제 허리를 꺾어
속 대를 쥐어 틀어 물기를 말리고
타오르는 들불의 꿈을 꾸며 잠이 든
늙은 갈대의 가쁜 숨소리
11월이 가는 갈밭 길에는,
빠른 걸음으로 노을이 오고
석양마다 숨이 멎던, 하루를 또 보듬으며
목 젖까지 속울음 차오르던 소리를
처음에는 문득, 바람인 줄 알았다

 

 

 

11월 저녁

 

          <정수자>

 

다 해진 길을 끌고 가을이 가고 있다
목마다 목이 시린 시래기 같은 시간들
그 어귀 외등을 지나는
당신 등도 여위겠다
가으내 비색에 홀린 바람의 당혜 같은
귀 여린 잎사귀도 먼 곳 향한 귀를 접고
제 안의 잎맥을 따라
한 번 더 저물겠다

 

 

 

입동 저녁      

 

          <이성선>

 

벌레소리 고이던 나무 허리가 움푹 패였다
잎 없는 능선도 낮아져 그 아래 눕는다
가지 하나가 팔을 벌여 내 집을 두드린다
나무가 하늘에 기대어 우는 듯하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바라만 본다
저문 시간이 고개 숙이고 마을을 서성거리고
그의 머리 위로 별이 벼꽃처럼 드물다
낡은 문 창에 달빛이 조금씩 줄어든다
달 내리는 소리가 마당을 지나 헛간에 머문다
누군가 떠나고 난 자리가 세상보다 크고 깊다

 

나무가 하늘에 기대어 우는 듯하다

 

 

 

입동 이후

 

        <이성선>

 

가을 들판이 다 비었다
바람만 찬란히 올 것이다

 

내 마음도 다 비었다
누가 또 올 것이냐

 

저녁 하늘 산머리
기러기 몇 마리 날아간다

 

그리운 사람아
내 빈 마음 들 끝으로

 

그대 새가 되어
언제 날아올 것이냐

 

 

 

늦어도 11월에는

 

                 <김행숙>
 
느릿느릿 잠자리 날고
오후의 볕이 반짝 드는 골목길
가을 냄새가 시작된다

시들어가는 시간
사람들이 종종걸음 치는 저녁 때면
어김없이  등줄기가 시리다

갑자기 햇살이 엷어지고
나뭇잎 하나 툭! 떨어져 내리면
나도 옷깃을 여며야 한다
내일을 기약하는 마른 풀잎처럼
다시 마음을 다잡으리라
늦어도 11월에는.

 

 

 

 

 

 

 

 

 

 

 

출처 : 사반나
글쓴이 : 사반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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