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의 법칙
홀로의 법칙 (요16:32-33) 364장
잇달아 들려오는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은 우리의 마음까지도 흔들어 놓고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염려되는 것은 동조자살 또는 모방자살로 나타나는 ‘베르테르효과’에 우리의 청소년들과 이웃들이 빠져들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입니다. 안재환의 자살은 사업실패로 인한 부채 때문이라 하고, 최진실은 악풀과 이혼으로 인한 우울증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피상적 이유일뿐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삶의 목적과 가치가 상실되어 생의 소망이 끊어진 까닭이고, 다른 하나는 고독과 사랑결핍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유럽의 개는 도둑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독을 지킨다."는 말이 있듯이 헨리 드러몬드(Henry Drummond)는 ‘개를 사랑하는 만큼의 사랑’이 있어도 생명을 부지할 것이라 합니다.
“왜 당신은 내일도 살기를 원합니까? 그 이유는 누군가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며, 당신도 내일 같이 있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고, 내일 사랑을 베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아무도 사랑할 상대가 없을 때에 자살한다. 그에게 친구가 있고, 그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으며, 그가 사랑할 사람이 있으면 그는 살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사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개를 사랑하는 만큼의 사랑만 있어도 그는 생명을 부지할 것이다.” (헨리 드러몬드『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김진홍의 아침묵상에서 인용)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깨어 있게 만드는 숫자가 홀수라고 합니다. 홀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피로함도 덜하고, 지루하고 견디기 힘든 권태에 빠지는 예도 적을 뿐 아니라, 홀수일 때 리더십을 잘 발휘할 수 있다고 합니다. 헌데 최고의 홀수는 1인이라고합니다. 실제로 크게 쓰임받는 사람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홀로 있을 때 변화되었습니다. 홀로 있는 시간이 강력함으로 이끕니다. 그것은 홀로일 때 묵상과 깊어지는 시간을 충분히 갖기 때문입니다. 토저는 “큰 독수리는 홀로 날아간다. 큰 사자는 홀로 사냥한다. 위대한 사람들은 홀로 간다.”고 했듯이, 하나님은 하나님과 함께 가며 홀로 있음을 즐거워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야곱도 홀로 남았을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창32:24) 예수님도 혼자 계시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혼자 있는 법을 배워야 강력해집니다. 홀로 있음을 두려워 마십시오. 혼자 달려야 합니다. 혼자 이겨야 합니다. 무엇보다 홀로 있는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누군가와 함께 생각하고 같이 행동해야 마음이 편합니다.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왠지 불안하고 불편합니다. 그런까닭에 고독은 곧 외로움이요, 쓸쓸함이요, 사회적 소외와 외톨이로, 고통스러움으로 벗어나고픈 비애의 감정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독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시도하려고 몸부림칩니다. 친구를 찾아 나서고, 전화에 매달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술과 마약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간혹 홀로여야 합니다. 자신의 미래, 자신의 양심과 행동, 엄연한 현실과 인생 앞에 거울처럼 다가가 혼자 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위의 시선을 지워버리고, 환경과 관계의 끈들을 놓아 버리고 단독자로 마주 서서 자신을 겸손하고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홀로 있는 단독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이 철저하게 단독자임을 깨닫는 자만이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삶의 의미와 가치가 새로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홀로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홀로 있음(론리니스 loneliness)을 뜻하지 않습니다. 고독은 고립과 불안도 아닙니다.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절규하는 심령의 부르짖음입니다. 인생을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 직면할 때 멈춰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극적 고독(솔리튜드 solitude)을 통해 본연의 모습을 찾는 것입니다. 자신이 혼자임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여 깊은 고독으로 승화할 때 우리는 그 고독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고, 그렇게 될 때 아름다운 공동체도 이루어집니다.
박노해 시인은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노래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희망이라고 노래해야 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고백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깊은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이 깊은 고독 속에 내 생명 끝나도 사나운 풍랑 일 때 날 지켜주시고 내 곁에 계신 주님 늘 힘이 되시네"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를 잘못 알고 몰라주고 버리고 괴롭히는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결코 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혹 엄청난 잘못을 저질러 도무지 낯을 들 수 없고, 심지어 스올에 빠지는 고통속에서도 희망과 살아야 할 이유를 찾습니다. 그것은 결코 혼자 내버려두지 않고 함께하시는(요16:32,마28:20)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요16:33,롬8:37)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기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깊은 고독속에서 단독자의 체험을 가진 사람은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희망찬 하루를 맞이 합니다. 삶의 활기가 넘쳐나고 소망이 있습니다.
구슬픈 벌레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불러내 고독이 가슴에 안겨와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가을에 고독할 수 있는 것은 감성이 살아 있기 때문이고, 고독하다는 것은 삶을 느끼며 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외로워야 거룩한 순례의 길을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고 외로운 자만이 떠날 수 있는 찬란한 순례의 길을 떠났으면 합니다. 아름다운 낙엽이 되어 세상을 떠난 시인 김현승 선생은 그의 시 <가을의 기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시인은 또 <가을은 눈의 계절>이라는 시에서, “낙엽들이 지는 날 가장 슬픈 것은 우리들 심령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떨어지는 낙엽으로 모든 것이 슬퍼 보이는 것 같지만, 그것은 실은 우리 심령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어 주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낙엽떨어지듯 모두 흩어져 혼자 있을 때가 분명히 옵니다만 그것은 단독자로 하나님과 대면하여 더 깊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 구현하는 은혜의 기회가 되어질 것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목포정명여자중학교 2008년 10월 6일 교직원예배:윤삼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