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fferent
「다름의 심리학」이란 책의 저자 노주선씨는 "가장 쉽게 그리고 간단하게 행복해지는 방법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나와 어떤 다름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고 그들과 나의 다름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 다르게 창조되었으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가 우리의 미래와 행복을 좌우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인간관계를 맺어두는 것이 꿈을 이루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중요한 조건이 되는데, 성숙한 인간관계를 갖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차이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틀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것을 틀렸다고 말할 때 우리는 다양성을 무시하게 되고, 결국은 관계가 깨어지고 나누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은 오히려 다양함을 맛보게 하는 축복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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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을 틀리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를 강준민 목사는「관계의 법칙」에서 무지와 미숙한 생각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똑같은 모습으로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각기 다른 재능과 환경과 성격 등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다른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되 서로 다름을 통해 보필하도록(창2:18) 하였듯이 우리가 다른 것은 서로가 서로를 돕고, 서로 조화를 이루어서 멋진 하나님의 작품을 만들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바른 인간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다름은 틀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것만 좋아하면 미숙한 사람입니다. 다른 것을 인정하고 서로 보완해 줄 때 성숙함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의 크기는 다른 사람을 얼마나 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숙하면 자기와 다른 사람들도 인정하고 품지만 미숙하면 자기와 다른 것은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서로의 다른 점을 보충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하고 이해할 때 우리의 관계는 놀랍게 새로워집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여기거나, 다른 것을 가지고 비교하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습니다.
모 방송국에서 '똘레랑스, 차이 혹은 다름'이란 시사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방송사는 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를 "너와 내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소통하려 하는 것. 서로의 존재를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며, 우리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똘레랑스할 것과 앵똘레랑스할 것을 구별하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똘레랑스란 말을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한 홍세화씨는 우리 나라는 정이 많은 사회이지만 참견을 잘하고 강요하는 사회인 것 같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와 다른 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와 똑같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나와 똑같은 이념을 갖기를 강요하며 나와 똑같은 신앙을 갖기를 강권합니다. 그리하여 그 요구에 순응하면 한편이 되고 또 이른바 '정'을 주기도 하지만 따라오지 않으면 바로 적대관계로 돌변합니다." 이어서 그는 이 같은 강요의 논리로 인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대로 똘레랑스가 강조되는 사회에선 강요나 강제하는 대신 토론하고 상대를 설득시키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러다 벽에 부딪히면 '그에겐 안된 일이지만 할 수 없군!'하며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섭니다. 강제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치고 받고 싸우지도 않고 또 미워하지도 않으며 앙심을 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1627년 인조 재위 5년 되던 때, 조선은 청나라의 1차 침입 곧 정묘호란을 겪게됩니다. 그로부터 9년 뒤 청나라의 2차 침입인 병자호란으로 우리 나라는 전 국토가 유린되고, 급기야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게 됩니다. 이른바 삼전도의 치욕이라 합니다. 이 무렵, 당시의 조정에는 청나라의 위세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와 화친해서는 안 된다는 척화론(斥和論)과 청나라와 화친하여 후일을 기약해야 한다는 강화론(講和論)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청나라의 힘에 밀려 최명길의 강화론이 힘을 얻게 되고, 결국 청에 항복문서를 최명길이 작성하여 인조께 바치려 했을 때, 곁에 있던 척화론의 대표격인 김상헌은 그 문서를 찢고 통곡했다 합니다. 그때 찢어진 문서를 주워 모으면서 최명길이 하였다는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 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 김상헌과 최명길, 이 두 분은 서로 생각은 달랐지만 모두 각자 처한 입장에서 조국을 사랑했던 애국자라 생각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무조건적으로 매도하거나 정죄하지 않았던 두 분의 삶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똘레랑스(toleramce)란 라틴어에서 온 말로 참다, 견디다, 관용, 용인 등으로 번역됩니다만, 홍세화씨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란 책에서 똘레랑스의 의미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 두 번째는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되는 자유를 말합니다. 첫 번째 말뜻이 나와 남 사이의 관계 또는 다수와 소수 사이의 관계에서 나와 남을 동시에 존중하고 포용하는 내용을 품고 있다면 두 번째 말뜻은 권력에 대하여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려는 의지를 품고 있습니다. 즉, 톨레랑스는 남의 생각과 행동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잘못으로 매도하지 않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럴 수도 있다'고 용인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생각을 바꿀 수 있어도 의도적으로 용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관심과 포기와는 다른 것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사회가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크게 어긋나지 않고 굴러가는 것도 톨레랑스의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홍세화씨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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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떻게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똘레랑스의 사회가 되어질까요? 대충 눈감아주고 모르는 척 해주는 것으로는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똘레랑스란 단순히 상대의 태도를 보아 넘기거나 지나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다른 의견이나 태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나아가 토론하고 설득하는 적극적인 자세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름의 심리학」의 노주선은 다름은 노력을 통해 행복으로 바뀐다고 하며 첫째, 나의 다름을 연구하라. 둘째, 타인의 다름을 연구하라. 셋째, 다름을 이해하기 위한 효과적인 의사소통 기법을 구사하라. 넷째, 다름을 인정하기 위한 대인관계 구구단을 외워라. 다섯째, 다름으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갖출 것의 다섯 가지 지혜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상대를 인정하고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TV에서 새로 나온 휴대폰 광고의 카피를 보았습니다. 'It's different' 아마 기존의 휴대폰과 무언가 다른 기능의 탁월함을 나타내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다르기 때문에 탁월할 수 있는 것이지, 다르기 때문에 틀린 것이 아닙니다. 한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획일화된 가치를 적용해 서로에게 잣대를 들이대는 것보다 다양한 가능성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상대편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 싸울 때 사울 왕은 자기 갑옷을 입히고 투구를 씌워 보냈지만 다윗은 도리어 불편하고 어색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삼상17:39) 하고 자기에게 익숙한 것으로 골리앗에게 나아갔던 것처럼 서로의 익숙한 방식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크리스챤들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신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제품이야 이전 것보다 우수하다는 전제가 있고, 세상 사람들이야 남보다 나은 무언가가 있으면 특별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누구와 비교될 필요도 없이 어떤 형편과 모양 그리고 환경에도 제한되지 않고 우리는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특별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너는 내 것이라'(사43:1)는 하나님의 선언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왕 같은 제사장들(벧전2:9)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의 각 부분(고전12:27)입니다. 즉 여러 지체가 서로 돌아보아 함께 즐거워해야 하는(고전12:25-26) 한 몸으로 모두가 존귀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주신 선물의 분량대로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도록(엡4:7,13) 힘써야 합니다. 나아가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서로 연락하여 도움을 주어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가듯(엡4:16), 우리는 서로의 방법과 생각을 존중하며 다름의 조화를 통해 성숙한 사회를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목포극동방송 2005년 11월 1일 비전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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