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많은 청년·학생들이 신앙과 공부 사이에서 여간 갈등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도 잘하고 싶고, 교회 생활도 잘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소위 공부파는 경건생활을 등한시하는 것에 은근히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자기정당화를 하고, 경건파는 그와 반대로 자기합리화를 꾀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시대가 시대인 만큼 공부를 우선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만큼 신자유주의 시대는 취업과 성공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우리를 각박하게 몰아갑니다. 그래서인지 전자가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신앙이란 공부와 기도가 분리되지 않은 것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공부도 잘한다 / 김기현
이런 상황에서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공부도 잘한다는 말은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보입니다. 비현실적인 것은 교회 일에 열중하면 공부하는 시간이 모자라고, 공부에 열심이면 기도할 시간이 부족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에 ‘기도=공부’라는 공식은 어불성설인 듯합니다. 게다가 기도깨나 한다는 사람치고 공부 잘하는 사람 못 봤다는 현실도 위 명제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기도란 것이 뭔가 신비주의같고, 열광주의같아서 공부와 무슨 상관 있을까 싶습니다. 학문이란 모름지기 합리주의적 활동인데, 어떻게 그런 신비주의와 만날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기도한다
저는 세 가지 근거를 들어서 기도를 잘하는 것이 공부도 잘한다는 명제를 확증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역사적 실례입니다.
사실 위의 명제는 마르틴 루터의 것으로 그의 영적 좌우명이었습니다. 그는 “나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루에 3 시간씩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합니다. 그의 기도 습관은 수도원에서 훈련받는 것입니다. 그는 창문 옆에서 하루에 3시간씩 어김없이 기도했습니다. 실제 루터와 처음에는 같은 길을 걷다가 갈라선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에라스무스는 그의 기도 생활에 질려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도에 열중한 루터였지만,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교회 문 앞에 그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내건 후로 평생에 1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합니다. 그 권수는 40일에 한 권꼴이라고 합니다. 40일에 한 권이라! 경이와 경탄을 지나서 경악스럽습니다. 그의 저술은 방대함과 깊이, 무엇보다도 열정과 힘을 느끼게 합니다. 허투루 쓴 글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을 가능케 했고, 독일 루터교가 그의 경건, 곧 기도와 저술 활동 위에 태동했습니다. 그의 저술 능력의 원천은 바로 기도와 열정에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경입니다.
루터의 힘의 원천이 기도에서 나왔다는 것은 성경으로 볼 때에 당연합니다. 의사이자 목사인 지난 세기 위대한 설교자인 로이드 존스는 의학적으로 성령충만과 술 취함을 잘 비교해줍니다. 약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알코올은 억제제입니다. 이는 우리 상식과 다릅니다. 경험적으로 술은 사람을 흥분시켜서 이성을 잃게 만듭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술은 두뇌의 중요한 활동을 억제합니다. 자제력, 이해, 분별력, 몸의 균형 등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을 통제하고 억누릅니다. 정상적인 것이 억제되니까 자연 술 취하면 이상해지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바울은 성령충만과 술 취함을 대조합니다. 술 취함이 억제제라면, 성령충만은 활성제입니다. 인간의 지성과 몸, 양심과 상상력을 활발히 움직이게 합니다. 제 정신을 놓아버리는 열광이나 광란은 성령충만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예수의 영으로 가득 차면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생각하면 엄청난 착각입니다. 도리어 성령으로 인해 인생의 지혜와 학문의 지식에 진보를 이루게 됩니다. 이제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잠언 말씀의 속 깊은 뜻을 이해합니다. 게다가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요 16:13). 예수가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충만하면 지식의 증가와 진보를 이루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루터, 성경적으로는 성령의 활동은 기도와 공부의 상관관계에 대한 명제를 더 확고하게 해줍니다. 이는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목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루터의 모습이 예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고리타분한 고대 문서인 성경에 기록된 문자만은 아니랍니다. 제 선배들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두 선배는 신앙이란 공부와 기도가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채 하나로 통전된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두 사람은 하나같이 대학생인지 목사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와 제자훈련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고도 나름대로 학문의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한 분은 지금 한동대학교에서 국제어문학부에서 영어와 영문학을 가르치는 윤상헌 교수입니다. 이분은 제 일대일 리더였습니다. 성남에서 이문동 캠퍼스까지 매일 아침 와서 제게 경건의시간(QT)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제가 QT를 하지 않으면 그날 일대일 공부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서울침례교회 대학부는 지체들이 300명이 넘는 매머드급이었습니다. 대표리더로 모든 캠퍼스 모임과 리더를 챙겨야 하는 그였기에 언제 공부할까 싶었습니다. 대학원에 수석 합격하고도 그 사실을 한 학기가 지날 때까지도 전혀 몰랐을 정도입니다. 지금은 학문을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그리고 사회적 공헌을 위해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힘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분은 부산대학교 러시아어과에서 교수하는 최동규 선배입니다. 미국에 유학 가서도 제자훈련을 하느라 한 두 학기 졸업을 미루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충북대학교에서 전임교수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어도 부산대학교를 고집했다고 그분이 제게 털어놓았습니다. 그 까닭은 부산에 러시아인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러시아 선교를 일평생의 비전으로 삼고 있는 그분에게 러시아 사람 하나 없는 곳에 가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취업을 위해서라면 자기 얼굴까지 뜯어고치는 세대에 비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이 참 감동적입니다.
루터와 성경, 제 선배들의 모습은 하나를 말합니다. 기도를 잘하는 사람은 공부도 잘한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을 달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는 기도만 잘한다고 공부도 잘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천당”이라는 슬로건으로 잘 알려진 최권능 목사님이 계십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버럭 “예수 천당”을 외쳐서 놀라게 한 사람, 그 말 한마디로 숱한 영혼을 주께로 인도한 능력의 사람이라 본명 최봉석이 아니라 최권능으로 기억되는 이 성령의 사람도 학과 공부만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충만해도 3번이나 시험에 낙제를 했습니다. 그래서 남긴 그의 한마디가 명언 중의 명언입니다. “시험에는 성령님도 쩔쩔 매는구먼!”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갈 6:7). 공부하지 않고 밤새 기도하고 좋은 성적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연법칙의 위배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놀리는 것입니다. 심은 것 이상으로, 심지 않은 것을 거두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조롱한다고 했습니다(갈 6:7). 공부하지 않고서 그저 하나님께서 은혜를 폭포수처럼 부어주셔서 지혜를 주실 것으로 믿고, 실제로 그렇게 행한다면, 그것은 경건이 아니라 불경건입니다.
기도는 불필요한 시간을 줄여준다.
그러므로 균형이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만큼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공부하면서 기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도와 공부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어느 하나를 버리거나 줄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도는 시간 허비가 아닙니다. 도리어 불필요한 시간 사용을 줄여줍니다. 기도를 하니 잡생각이 사라지고, 공부에 전념해 좋은 결과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균형 속에서도 요즘 공부를 위해서라면 개인 경건은 물론, 예배도 자유롭게 빼먹는 이때에 기도의 회복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우선입니다. 공부하기 전에 기도해야겠습니다. 공부하는 중에라도 수시로 기도해야겠습니다. 공부 자체가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제 선배들처럼 성령충만한 사람이 공부도 잘하고, 루터처럼 기도를 잘하는 것이 공부도 잘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청년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김기현 / 부산 수정로침례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