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뽀할 때 왜 눈을 감나요?
눈뜨면 보이지 않는
그대가
눈감으면
어느 사이에
내 곁에 와 있습니다
(용혜원/혼자 생각)
눈을 감고 세상을 그려보면 시인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천사들의 웃음소리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름다운 하늘나라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는 몸의 거리가 있어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는 만날 수도 볼 수도 없지만, 눈을 감고 마음으로 다가가면 언제든 어디서든 한걸음에 달려가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도 보고픈 마음 간절할 때마다 눈을 감는가 봅니다. 이렇게 눈감아야 보이는 얼굴들처럼 부풀어오르는 우리들의 꿈과 희망도 때론 눈을 감아야 볼 수 있습니다. 베토벤은 귀를 멀고도 머리 속에 울리는 음악을 악보에 옮겼고, 화가 고갱은 말년에 눈이 멀고도 그림을 그리고, 존 번연은 16년의 감옥살이 중에서도 하늘을 보고「천로역정」이란 작품을 그렸는데, 우리는 왜 보아야만 믿고 들어야만 아는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하고 도마에게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이 제 귀에도 들려오는 듯 합니다.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라고 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고백처럼 눈을 감고도 주님을 만나고 느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학생들에게 황당한 질문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사람들은 입맞춤을 하는 가장 달콤하고 짜릿하며 스릴 넘치는 순간에 왜, 눈을 감느냐는 것입니다.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인데다 사춘기인 아이들에게는 굉장히 민감한 내용이라 한참을 망설이다 대뜸 대답 대신 '그럼 너는 기도할 때 왜 눈을 감고 기도하니?' 하고 그만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만 왜 그럴까요?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시간에 눈을 감는 것은 눈을 감지 않으면 보이는 게 많아 기도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을 감지 않으면 너무 많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오히려 깊은 만남과 감성을 방해할 뿐 아니라 집중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남녀가 입맞춤을 할 때에 눈을 감는 것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다른 감각을 더욱 짜릿하게 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눈을 감는 것은 이처럼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탐험이며,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보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과학문명의 발달과 눈에 보이는 현란함 때문에 도리어 다른 많은 감각을 무시하거나 잃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에만 집중하며 살아갑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믿는 것이 바로 눈입니다. 그래서 먹어보고, 만져보고, 들어보고, 맡아보고, 해보고, 전부다 보고 믿겠다고 하고, 심지어 예배도 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보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통하여 보는 것뿐이지 다른 모양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철학자 데카르트가 길을 지나가다 큰 구렁이를 만났습니다.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들어 힘을 다해 뱀을 죽였습니다. 다음날 또 그 길을 지나가는데 구렁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힘을 다해 죽이고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날 그 길을 지나는데 역시 그 구렁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소름이 끼쳤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뱀을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뱀은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정신을 차린 그가 자세히 다가가서 보니까 뱀이 아니라 긴 오랏줄이었답니다. 이때 데카르트는 "내 눈이 나를 속였다" "내가 내 눈도 믿을 수 없는데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뜬눈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나마 그것조차도 바르게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감춰진 신비와 오묘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연인들도 자신들도 모르게 신비한 체험이라고 여기는 입맞춤을 할 때에 눈을 감는 게 아닐까요? 눈을 감으면 더 아름답고 달콤하게 느끼고 깊이 빠져들 수 있을테니까요. 의식이 깨어있는 상황에서 눈을 감는다는 것은 계획적이고 인위적인 행동입니다. 잠을 잘 때처럼 아무런 생각이 없이 감는 게 아니라 어떤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잠재우고 더욱 감성적이고 원초적인 자신에 충실하거나, 자신을 넘어서는 더 큰 무엇을 느끼려는 의도된 행동으로 깊은 사색을 하거나 기도를 할 때입니다. 즉 눈을 감는 것은 외부의 위협이나 간섭이 없는 공간에서 일상의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존재와의 합일을 추구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눈을 뜨고 보는 것보다 감을 때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눈을 감아야만 볼 수 있는 세상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는 태양을 볼 수 없지만, 눈을 지긋이 감을 때 태양을 더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눈 하나 열고 닫는 반복 훈련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나, 꽃향기를 맡을 때도 눈을 감습니다. 눈을 감고서야 음악의 진수와 꽃의 향기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누가 그랬던가요? '사랑하는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는 거라고' 진정 보고 싶을 때는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깁니다. 세상은 마음의 눈에 따라 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세상이 밝아지고, 마음의 눈이 아름다워지면 세상도 아름다워집니다. 관심도 관찰도 열린 눈이 필요합니다. 그냥 눈이 아닙니다. 마음의 눈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눈을 감아도 보입니다. 그 전까지 안 보였던 것, 못 보았던 것도 보입니다. 더 깊이 보이고, 더 멀리 보입니다. 더 나아가 눈을 감으면 세상을 마음대로 아름답게 만들 수 있고, 상상의 나래를 펴고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살랑 살랑 봄바람을 타고 나비가 되어 햇살 한줌 어깨에 앉아 쉬어 갈 수도 있고, 무르익은 어스름 밤에 풀벌레처럼 합창을 하고, 가을엔 단풍처럼 붉게 익어 가는 사랑을 나누고, 겨울엔 루돌프가 끌어주는 썰매로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만화의 주인공처럼 은하철도를 타고 은하수를 누비기도하고 동화 속 신데렐라도 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눈을 감으면 행복하고, 따뜻하고, 신선하고, 신비한 세계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까마득한 절망의 벽 앞에서 헤어날 방도를 찾지 못해 죽음의 유혹이 은밀하게 스며들 때에, 사람에게 물어도 해결이 안 나는 일, 아니 물어볼 수조차 없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거든 조용히 눈을 감고 영혼의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세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고 노래하는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꿈과 희망은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마13:44)와 같습니다. 이 천국의 비밀은 눈을 뜨고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아야 보이는 신비의 세계입니다. 못 본 척하려고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기 위하여 눈을 감아야 합니다. 그러면 육신의 눈은 감지만 영혼의 눈은 열립니다. 이제 눈을 감고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돌아볼 여유가 필요한 때입니다. 눈을 감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께서 소망을 보여주실 것이며, 하늘의 풍성함과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을 알 수 있게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뽀뽀를 하듯 눈을 감고 주님과 살짝 거룩한 입맞춤을 해보세요. 이사야처럼 부정한 입술을 정결케 해 주실 것이며,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주님과 입맞춤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맛보신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멀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은 환하게 밝아져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란 찬송이 저절로 흘러나올 것이며, 세상도 환한 아침이슬같이 맑고 더욱 아름답게 펼쳐질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가고 있는 환경이 힘들고 괴롭고 어렵습니까? 그러면 두 눈을 감고 잠시 세상을 포근히 안아 보세요. 그리고 주님과 달콤한 입맞춤을 나누세요.
(목포극동방송 2005년 11월 22일 비전칼럼)
눈뜨면 보이지 않는
그대가
눈감으면
어느 사이에
내 곁에 와 있습니다
(용혜원/혼자 생각)
눈을 감고 세상을 그려보면 시인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천사들의 웃음소리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름다운 하늘나라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는 몸의 거리가 있어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는 만날 수도 볼 수도 없지만, 눈을 감고 마음으로 다가가면 언제든 어디서든 한걸음에 달려가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도 보고픈 마음 간절할 때마다 눈을 감는가 봅니다. 이렇게 눈감아야 보이는 얼굴들처럼 부풀어오르는 우리들의 꿈과 희망도 때론 눈을 감아야 볼 수 있습니다. 베토벤은 귀를 멀고도 머리 속에 울리는 음악을 악보에 옮겼고, 화가 고갱은 말년에 눈이 멀고도 그림을 그리고, 존 번연은 16년의 감옥살이 중에서도 하늘을 보고「천로역정」이란 작품을 그렸는데, 우리는 왜 보아야만 믿고 들어야만 아는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하고 도마에게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이 제 귀에도 들려오는 듯 합니다.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라고 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고백처럼 눈을 감고도 주님을 만나고 느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학생들에게 황당한 질문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사람들은 입맞춤을 하는 가장 달콤하고 짜릿하며 스릴 넘치는 순간에 왜, 눈을 감느냐는 것입니다.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인데다 사춘기인 아이들에게는 굉장히 민감한 내용이라 한참을 망설이다 대뜸 대답 대신 '그럼 너는 기도할 때 왜 눈을 감고 기도하니?' 하고 그만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만 왜 그럴까요?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시간에 눈을 감는 것은 눈을 감지 않으면 보이는 게 많아 기도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을 감지 않으면 너무 많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오히려 깊은 만남과 감성을 방해할 뿐 아니라 집중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남녀가 입맞춤을 할 때에 눈을 감는 것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다른 감각을 더욱 짜릿하게 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눈을 감는 것은 이처럼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탐험이며,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보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과학문명의 발달과 눈에 보이는 현란함 때문에 도리어 다른 많은 감각을 무시하거나 잃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에만 집중하며 살아갑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믿는 것이 바로 눈입니다. 그래서 먹어보고, 만져보고, 들어보고, 맡아보고, 해보고, 전부다 보고 믿겠다고 하고, 심지어 예배도 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보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통하여 보는 것뿐이지 다른 모양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철학자 데카르트가 길을 지나가다 큰 구렁이를 만났습니다.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들어 힘을 다해 뱀을 죽였습니다. 다음날 또 그 길을 지나가는데 구렁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힘을 다해 죽이고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날 그 길을 지나는데 역시 그 구렁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소름이 끼쳤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뱀을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뱀은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정신을 차린 그가 자세히 다가가서 보니까 뱀이 아니라 긴 오랏줄이었답니다. 이때 데카르트는 "내 눈이 나를 속였다" "내가 내 눈도 믿을 수 없는데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뜬눈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나마 그것조차도 바르게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감춰진 신비와 오묘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연인들도 자신들도 모르게 신비한 체험이라고 여기는 입맞춤을 할 때에 눈을 감는 게 아닐까요? 눈을 감으면 더 아름답고 달콤하게 느끼고 깊이 빠져들 수 있을테니까요. 의식이 깨어있는 상황에서 눈을 감는다는 것은 계획적이고 인위적인 행동입니다. 잠을 잘 때처럼 아무런 생각이 없이 감는 게 아니라 어떤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잠재우고 더욱 감성적이고 원초적인 자신에 충실하거나, 자신을 넘어서는 더 큰 무엇을 느끼려는 의도된 행동으로 깊은 사색을 하거나 기도를 할 때입니다. 즉 눈을 감는 것은 외부의 위협이나 간섭이 없는 공간에서 일상의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존재와의 합일을 추구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눈을 뜨고 보는 것보다 감을 때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눈을 감아야만 볼 수 있는 세상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는 태양을 볼 수 없지만, 눈을 지긋이 감을 때 태양을 더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눈 하나 열고 닫는 반복 훈련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나, 꽃향기를 맡을 때도 눈을 감습니다. 눈을 감고서야 음악의 진수와 꽃의 향기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누가 그랬던가요? '사랑하는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는 거라고' 진정 보고 싶을 때는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깁니다. 세상은 마음의 눈에 따라 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세상이 밝아지고, 마음의 눈이 아름다워지면 세상도 아름다워집니다. 관심도 관찰도 열린 눈이 필요합니다. 그냥 눈이 아닙니다. 마음의 눈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눈을 감아도 보입니다. 그 전까지 안 보였던 것, 못 보았던 것도 보입니다. 더 깊이 보이고, 더 멀리 보입니다. 더 나아가 눈을 감으면 세상을 마음대로 아름답게 만들 수 있고, 상상의 나래를 펴고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살랑 살랑 봄바람을 타고 나비가 되어 햇살 한줌 어깨에 앉아 쉬어 갈 수도 있고, 무르익은 어스름 밤에 풀벌레처럼 합창을 하고, 가을엔 단풍처럼 붉게 익어 가는 사랑을 나누고, 겨울엔 루돌프가 끌어주는 썰매로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만화의 주인공처럼 은하철도를 타고 은하수를 누비기도하고 동화 속 신데렐라도 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눈을 감으면 행복하고, 따뜻하고, 신선하고, 신비한 세계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까마득한 절망의 벽 앞에서 헤어날 방도를 찾지 못해 죽음의 유혹이 은밀하게 스며들 때에, 사람에게 물어도 해결이 안 나는 일, 아니 물어볼 수조차 없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거든 조용히 눈을 감고 영혼의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세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고 노래하는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꿈과 희망은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마13:44)와 같습니다. 이 천국의 비밀은 눈을 뜨고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아야 보이는 신비의 세계입니다. 못 본 척하려고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기 위하여 눈을 감아야 합니다. 그러면 육신의 눈은 감지만 영혼의 눈은 열립니다. 이제 눈을 감고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돌아볼 여유가 필요한 때입니다. 눈을 감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께서 소망을 보여주실 것이며, 하늘의 풍성함과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을 알 수 있게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뽀뽀를 하듯 눈을 감고 주님과 살짝 거룩한 입맞춤을 해보세요. 이사야처럼 부정한 입술을 정결케 해 주실 것이며,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주님과 입맞춤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맛보신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멀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은 환하게 밝아져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란 찬송이 저절로 흘러나올 것이며, 세상도 환한 아침이슬같이 맑고 더욱 아름답게 펼쳐질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가고 있는 환경이 힘들고 괴롭고 어렵습니까? 그러면 두 눈을 감고 잠시 세상을 포근히 안아 보세요. 그리고 주님과 달콤한 입맞춤을 나누세요.
(목포극동방송 2005년 11월 22일 비전칼럼)
출처 : 교목전국연합회
글쓴이 : 윤삼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