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적(二重的)인 인간
마지막 청정지역이라고 여겨왔던
인제(麟蹄) 소양강 상류에 40㎞에 걸쳐
지난해 말부터 물고기들이 죽어 떠오르고 있다.
주변에는 축사나 공장도 없음에도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이유를 알 수 없기에,
누구 말대로 이제는 정말 모든 것이
끝나가는 모양이다.
자연(自然)도 추악한 인간의 위선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듯한 모습은 분명 조물주의
경고성 메시지가 담겨있기에,
인간들은 이제라도 이중적인 삶을
반성하고 자연과 신으로 돌이켜야만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옆으로 걸어가는 게의 모습처럼,
모든 인간은 이중성(二重性)을 갖고 있다.
인간은 신이 만든 피조물 중에 가장
위대(偉大)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가장 부패(腐敗)하고 비참한 존재다.
그것은 한 인격(人格) 안에
저급과 고상한 성향을 동시에 갖고 있고,
또 폭력과 평화를 갈망하는 성향을 더불어 갖는
인간은 야누스처럼 두 얼굴의 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날마다 매스컴을 통해 전해오는
인간이하의 만행들은 충격 그 자체인 것들이
많은데 사람의 한계를 넘어선 악행들은
과연 어디까지 계속 될지 궁금하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인간은 고귀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조차도 돈만 되는 일에선
갈등 없이 명예조차 헌 신발처럼 버리고,
자신보다 더 약한 이웃까지도
매장시키는 모습들을 도스또예프스키는
예견(豫見)하고 ‘죄와 벌’을 통해 계시한 모양이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나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인지를 그리고
인간은 얼마나 사악하고 이중적이라는 것을...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라도
자신의 절대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사악한 행위라도 가차 없이 저지르는
이중성(二重性)의 모습들은 가장 보편적인 가치조차
존재할 수 없고 오직 논리(論理)만을 강요하는
이 사회의 위선적인 자화상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중성을 날마다 경험하면서도
순간순간 그런 모습들을 볼 때마다,
순진하게도 또 분노(憤怒)하고 좌절하곤 한다.
그것은 자신도 이중적이지만 자신보다
위선의 도가 지나친 인간에 대해서
혐오감을 가지며 비난의 화살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그러한 상대적인 이중적인 사람들에
대해서 그렇게 스스로 잣대를 가질 수 있을까?
아니 그것보다는 왜 인간은 이중성을 가져야만
하는지에 대한 원인(原人)분석이
더 필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모태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변모(變貌)를 거듭한다.
극단적인 그 모습은 삶과 죽음이라는
대칭관계에서 구체화 되고 있다.
죽음이 비록 신과 인간이 만나는
경계선이 될지라도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克復)하려고 이중성의 모습을
가지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생명의 본질적인 형식을
모두 내포하고 있기에
인간은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반면에,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해 쉽게 적응하며
안주(安住)하려는 본능을 갖게 된다.
바로 그 점이 다른 사람들을
교훈적으로 가르치면서도 자신은
죄(罪)를 범하는 모순에 빠지게 한다.
또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갖지 못함의 한풀이로의 이중성이
종교(宗敎)의 필요성을 갖게 했고 때론
윤리적인 삶을 요구하기도 한다.
한 여자를 너무 사랑한 한 남자가
사랑한다고 말도 못하는 그는
불가능한 사랑을 음란한 글로 써 결국
그의 상상은 널리 인간을 음란케 했다는
‘음란서생’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렇듯 갖지 못함의 한풀이가
사람을 이중적인 구조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중적인 존재에 대한 선이해가
있다 해도 그런 사회 속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 길이 최선이 될 것인가.
첫째는 선택(選擇)의 중요성이다.
어떤 사람이 이러한 이중적인 마음에
회의를 느끼고 인간의 선과 악을
분리 연구하여 드디어
악(惡)만 있는 사람을 만들고
선(善)만 있는 사람을 만든 것이 가능하다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은 결코 원래부터
선(善)만 있고 악(惡)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는
이중적인 존재지만 그것은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분명히 이중성이 있지만
본인의 의지선택에 따라 천사같이 살 수도 있고
악마처럼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돈도
시험에 빠지게 하는 도구도 되지만
사람을 살리는 수단이 된다는 이중적인 성격이 있다.
그러므로 돈의 책임을 인식하여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청지기로서
이웃과 나눔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오직
본인이 선택해야할 과제일 뿐이다.
우리는 무엇이 중요한지는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으로 보이지 못하는 나약한
이중적인 자세가 문제다.
둘째는 평형(平衡)의 중요성이다.
뛰어난 균형 감각을 지녀야만
이생과 영생이라는 줄을 건널 수가 있기에,
인생을 줄타기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世上)에서 이중성을 만날 때 오히려
내세(來世)에 대한 귀 기울임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은 굉장히 모순 되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내세를 향한 과정으로서의 현세이기에
모순이 가득한 세상 줄을 잘 타야 하는데,
그것은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평형을 말한다.
평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저 하늘과 교통하고 있음이요,
나와 이웃이 교제하고 있음이요,
세상에서 하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세상이 썩었다고
이 땅을 포기한 사람처럼 살아서도 안 되고
오직 하늘에만 인생의 모든 것이 있는 것처럼
이 땅에 소속감이 없는 것처럼 살아도
안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축복(祝福)의 중요성이다.
복(福)이란 많은 것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으로 베푸는 삶을 말한다.
베푼다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인간적인 신뢰와 섬김이다.
직장 내 진짜 꼴불견 BEST 7을 뽑았는데,
1위가 강한 사람에게는 굽신거리고
약한 사람에게는 큰소리치는 사람이라고 했다.
미국에서는 식당에서 웨이터에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 성공의 가능성을 안다고 한다.
그만큼 상대를 존경하고 믿어준다는 것이
축복(祝福)의 실체가 된다.
아삽의 시(詩)처럼 우리는 악인들이
강포를 행하면서도 더 잘사는 것을 볼 때
불평하고 싶지만, 자신을 향한 진정한 복을 깨닫고
마음에 큰 기쁨을 얻으며 자신보다 작은 자 외에
모든 사람을 축복하며 섬기는 삶이
부당하고 이중적인 세상을
이기는 최선의 길이 될 것이다.
주여,
마음은 하늘을
향하면서도
세상 복은 다 받겠다는
이중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자신을 보는 것 같아
민망스럽습니다.
제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제가 갖지 못하고
누리지 못함에 한 맺은
사람처럼,
이중적인 잣대로
그들을 판단했던 이 무지한
종을 용서하소서.
세상이 부패하고
사람은 위선이 가득한다 해도,
날마다
선(善)을 선택하고
세상과 하늘의 평형(平衡) 유지하고,
이웃과 이 땅을 축복(祝福)하며
살게 하소서.
2006년 4월 23일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경포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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