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의미
사순절 마지막 기간인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주간에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지켜야 할 일은 절제와 구제 그리고 나눔과 헌신입니다. 일상의 익숙함과 편리함, 경쟁과 탐욕, 뽐냄과 좌절의 자리에서 벗어나 금식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실상을 대면하여 이를 씻어내고, 순수한 믿음,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금식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방법이며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금식이 금식으로만 끝나면 그것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금식을 통해 영혼이 맑아지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기도이고 말씀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절제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소비가 중시되는 현대 생활에서 절제가 없으면 그것은 과소비로 이어지고 결국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경건과 절제의 열매로서 이웃과 함께 나누는 실천을 통해 주님께 드려지는 헌신이 바로 사순절기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사순절의 절정은 '으깬 감자'처럼 내가 없어지는 죽음입니다. 감자를 철저하게 으깨 버리면, 감자의 형태는 사라지지만 형태가 사라지는 것은 물리적 변화이지, 화학적 변화는 아닙니다. 즉, 으깨졌다 하더라도 감자의 효능과 영향력은 전혀 사라진 것이 아닌 것처럼 크리스천의 삶도 형태는 깨지지만 영향력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이 세상에서 내가 으깨지는 훈련을 십자가의 삶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소금으로 사는 방법입니다. 소금그대로의 소금은 영향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 속에 들어간 소금은 자신의 형태가 다 녹아서 없어졌지만 먹어본 사람은 소금의 강력한 영향을 부인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깨진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깨진 모습은 당당한 모습보다 더 많은 일을 하기도 합니다. 살면서 고통과 어려움이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를 으깨어 약하게 하심으로 더 좋은 모습으로 사람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며 살게 하시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삶은 관계이며, 관계는 진실한 대화와 겸손한 태도를 통하여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고난주간을 지내는 진정한 의미는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삶을 채찍질하는 금식과 절제와 경건의 훈련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고 나아가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눔으로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통과 어려움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고, 왜 겪어야 하는지 그리고 고난이 주는 유익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십자가를 통해 찾는 일이기도 합니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통해 삶의 의미를 일깨운 세계적인 정신의학자입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아내와 부모 형제가 눈앞에서 죽어 가는 상황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이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랭클은 절망적 환경이 절망적 마음을 낳지 않도록 삶의 의미를 찾아 모든 순간을 감동하며 살기로 선택했습니다. 그는 깨진 유리 조각으로 수시로 면도를 했고, 떠오르는 햇살과 황혼의 아름다움에 감동했습니다. 또한 동료의 콧노래, 한 줄기 바람, 먼지 하나, 풀잎 하나, 수용소 입구에 핀 들꽃 하나에도 의미를 두고 감동하면서 삶의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고, 삶의 이유를 찾았기에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입구에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는데, 그 개울을 건너오는 사람마다 큰돌을 머리에 이고 건너와서는 그 돌을 개울가에 버리고 가곤 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선교사가 그 까닭을 묻자 이제 막 개울을 건너온 사람이 "이 개울은 비록 좁지만 한가운데는 물살이 어찌나 센지 이런 큰돌을 머리에 이고 지나지 않으면 물살 때문 떠내려 가 목숨을 잃게됩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생각지 않은 때와 장소에서 생명을 앗아갈 급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위험한 급류를 무사히 건너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돌과 같은 고통과 시련을 주십니다. 잠시의 무거움이 싫어서 피한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감당키 어려운 힘든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 때문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은 딱딱하고 냉랭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 인격의 싹을 피게 하는 쟁기와 같고, 때로는 우리 속에 가득한 더러운 오물과 거짓과 위선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은혜의 바다로 만들기 위해 쓸고 지나가는 폭풍과도 같습니다. 또한 고통은 모나고 다듬어지지 못한 우리의 못된 근성을 두드려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와 같고, 불신과 미신의 늪에 빠져 둔감한 우리의 양심에 진리의 세미한 음성을 증폭시켜 들려주는 확성기와 같습니다. 맞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모리아 산의 고통이 있었고, 요셉에게는 땅굴 감옥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대부분의 시들은 고통의 밤중에 쓰여졌고, 요한은 밧모 섬의 고통 중에 하나님의 계시를 들었으며, 사도 바울은 눈이 멀었을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같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말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은 위장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주님의 고난이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이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결국 부활의 승리로 바꾸어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고통에는 인생의 보람이 내포되어 있고, 내일의 승리가 예견되어 있고, 최후 승리를 위한 몸부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멸시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십시오. 대신에 그 고통이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넘어져 본 사람은 안다.
넘어져서 무릎에
빨갛게 피 맺혀 본 사람은 안다.
땅에는 돌이 박혀 있다고
마음에도 돌이 박혀 있다고
그 박힌 돌이 넘어지게 한다고.
그러나 넘어져 본 사람은 안다.
넘어져서 가슴에
푸른 멍이 들어 본 사람은 안다.
땅에 박힌 돌부리
가슴에 박힌 돌부리를
붙잡고 일어서야 한다고.
그 박힌 돌부리가 일어서게 한다고 (이준관/넘어져 본 사람은)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 삶에 진정한 보화를 만드십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은 있습니다. 그 고난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고난은 변장하고 온 축복이 되기도 하고, 헤어나지 못하는 파멸의 늪이 되기도 합니다. 고난주간에 우리가 배워야할 진정한 의미는 고난의 프리즘을 통해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한 마을에 꽃을 파는 노인이 있었는데, 이 노인은 가난하였고, 복장은 허름했고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굴 전체에 항상 행복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어서 사람들은 그 노인을 '행복한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지요?" 노인은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내게 행복의 비결이 하나 있지요" 라고 대답하며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이 나이에 어찌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고통을 당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부활의 새벽을 맞지 않았습니까. 저는 고난이 다가올 때마다 마음속으로 '사흘만 기다리자'고 다짐합니다. 그때부터 제 삶이 한결 행복해졌어요". 예수님의 부활을 "사흘만 기다리자"는 희망으로 받아들이면, 분명히 우리가 지고 있는 십자가는 사흘만에 부활로 바뀔 것입니다. 고난주간은 바로 이 행복 할머니처럼 힘들고 고통스럽고 괴롭고 외로울 때마다 매일 사흘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지금 주님 위한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는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목포극동방송 2006년 4월 11일 비전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