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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모방

물음표와 느낌표 2013. 4. 19.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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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되려면 먼저 인물을 만나야 한다. 자기가 목표로 하는 분야의 역할모델이 있으면, 삶의 까칠한 국면을 헤쳐 나가는데 도움이 된다. 여기서 ‘역할모델’이란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이상적인 인물을 말한다. 빌 게이츠, 이건희, 워렌 버핏, 피카소 등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역할모델을 세울 수 있다. 무작정 길을 가는 것보다 역할모델을 정해서 가면 용기도 얻고, 어느 순간 그보다 월등히 성장한 자신을 볼 수도 있다.

 

37년의 짧은 생을 살다간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에게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는 숭고한 역할모델이었다. ‘만종’과 ‘이삭줍기’로 유명한 밀레는 35세에 파리 근교의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농촌풍경과 농부의 모습을 그리면서 농민화가로 명성을 얻은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다. 빈센트는 생전에 밀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자신이 그림을 시작했을 때 이미 죽은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았다. 빈센트는 밀레의 그림을 모사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의 삶까지 철저하게 닮고자 했다.

■밀레의 그림과 삶을 모방하다

예술은 모방에서 시작된다. 다른 화가의 작품을 모방하면서 예술의 기본을 터득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한다. 빈센트는 밀레를 모방하여 자연과 농민을 열심히 그렸다. 그런데 밀레의 그림을 따라 그리긴 했지만 원화를 직접 보고 그린 것은 아니다. 밀레의 그림을 토대로 제작된 동판화나 사진 등을 보고 그렸다. 모두 흑백이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색깔을 칠했다. 이 과정을 그는 ‘번역’이라고 불렀다. 밀레 그림의 형태를 바꾸기도 하고, 색깔을 입히기도 했다. 이런 번역은 모방을 넘어선 재창조였다. 빈센트 특유의 거친 붓질과 색깔에 의해 그림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띠었다. 밀레의 그림보다 느낌이 더 강했다.

빈센트는 죽기 1년 전, 생레미 요양원에서 무려 20점의 밀레 작품을 집중적으로 모사한다. 그때 그도 명색이 화가의 신분이었다. 그런데도 초보자처럼 모사를 계속했다. 왜 그랬을까. 밀레처럼 농민화가로 살고자 했던 그였다. 그런데 요양원에 갇힌 상태에서 농민화를 실습하는 길은 오로지 밀레의 그림을 모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단순한 모사가 아니었다. “밀레의 소묘에 근거하여 유화를 그리는 것은 단순히 모사를 한다기보다 도리어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는 느낌”(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이 강했다. 연주자가 베토벤의 곡을 연주할 때 자기 특유의 해석을 가미하듯이, 빈센트도 자기 스타일로 그렸다.

빈센트는 밀레의 그림만 모방하지 않았다. 밀레의 그림은 언제나 모방과 창조의 대상이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밀레에게서 예술가로서의 삶을 배운다. 흥미롭게도 존경하는 스승의 삶과 예술을 모방하는 과정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삶과 예술까지 배운 것이다. 빈센트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밀레의 그림과 삶을 모방하다가 결국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창조해내기에 이른다. 비록 모방 대상자와 모방하는 자의 관계였지만 그들의 그림은 대조적일 정도로 개성이 뚜렷했다. 하지만 삶과 예술적 지향점만큼은 일치했다.

■창조적인 모방으로 거장이 되다

빈센트가 1889년에 그린 ‘정오―낮잠’은 농민 부부가 힘겹게 보리를 벤 뒤 보리더미 그늘에서 낮잠 자는 모습을 담고 있다. 오른쪽 보리더미 아래 부부가 누워 있고, 그 옆에 낫 두 개와 신발 두 짝, 그리고 멀리 소 두 마리가 한가롭게 서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그림은 1866년 밀레가 파스텔로 그린 원화와 형태가 정반대로 되어 있다. 왜 그럴까. 원화를 보고 그린 그림이 아닌 까닭이다. 빈센트는 이 그림을 1873년 한 미술잡지에 실린 목판화를 보고 그렸다. 그 목판화는 라비에유가 1866년 밀레의 그림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 목판화의 방향과 빈센트 그림의 방향이 같다.

빈센트는 흑백의 목판화를 보고 그린 뒤, 상상하여 색칠을 했다. 그래서 원화의 색채와 차이가 난다. 대표적인 것이 원화에는 없는 파란색 하늘이다. 비록 질감이 부드러운 밀레의 작품을 모사했지만 이 그림은 거친 붓질과 강렬한 색칠 같은 빈센트의 특징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창조적인 모방의 결과다.

■역할모델이 만든 위대한 화가

밀레는 빈센트가 평생 흠모한 역할모델이었다. 밀레의 그림을 따라 그리고, 그의 삶을 닮고자 탄광촌 생활까지 하면서, 밀레를 뛰어넘는 위대한 화가가 되었다. 그는 이미 고인이 된 밀레에게 의지하며, 작품과 삶을 벤치마킹하는데 성공했다. 역할모델이란 그 사람의 외형보다 그가 가진 정신에 더 큰 의미가 있다. 그 정신의 지향점이 한 인간의 삶을 곧추세우고, 그를 다른 누군가의 역할모델로 키운다. 빈센트는 사후에 후세 화가들의 대표적인 역할모델이 되었다.

고흐가 평생 흠모한 화가는 장 프랑수아 밀레였다. 밀레처럼 농민의 화가가 되고 싶었던 고흐는 생레미 요양원에서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1850)을 무려 스물한 번이나 따라 그릴 정도로 밀레의 그림과 삶에 매료되었다. 그의 ‘씨뿌리는 사람’(1888)은 밀레의 작품을 모사했으면서도 고흐 특유의 꿈틀거리는 듯한 붓질이 살아 있다. 고흐의 이 그림과 밀레의 그림을 비교해보면 한 화가가 어떻게 선배 화가의 그림과 만나서 자기 개성을 찾아가는지, 그 과정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본격적으로 집필활동을 시작한 시골의사 박경철씨는 글 쓰는 재주가 없어서 오정희 선생의 소설을 무려 열 번이나 반복해서 필사를 했다고 한다. ‘필사’ 하면 작가 신경숙의 이름이 떠오른다. “필사를 하는 동안의 그 황홀함은 내가 살면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각인시켜준 독특한 체험이었다.”필사를 하면서 필력과 작가의 꿈을 키웠다는 신경숙 작가의 말이다. 그녀가 선배 작가들의 작품을 필사하면서 문학수업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포함한 여러 단편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이청준의 <눈길> 등을 필사했다고 한다. 그녀가 일하던 공장에 노조가 생긴 후, 노조원들이 잔업 거부를 하는 여름방학 동안 멈춘 컨베이어 벨트 작업대 앞에서 그녀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노트에 옮기기 시작했다. 서울예술전문대학 입학 후, 신경숙은 한동안 대학생활에 적응을 못했다. 그러다 여름방학 때 고향 정읍에 내려가서 서정인의 <강>을 읽다가 노트에 옮겨 적어 볼 때 그 소설들의 느낌은 달랐다고 한다. 소설 밑바닥으로 흐르고 있는 양감을 훨씬 더 세밀히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당시 필사를 하는 동안의 그 황홀한 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필사를 하는 동안의 그 황홀함은 내가 살면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각인시켜준 독특한 체험이었다. 방학이 끝났을 때 필사를 한 노트는 몇 권이 되었고, 그 노트들은 마치 내가 쓴 작품인 양 가방에 넣고 서울에 돌아왔다.”손을 움직이면 뇌가 움직인다. 필사는 단순히 손으로 글을 옮겨 적는 일이 아니다. 필자는 지금도 노트에 글을 쓸 때가 있다. 손맛이라고 할까. 책을 보다가 명문장을 보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예전에 갈무리 해놓은 명언이나 아름다운 시들은 다시 보면 오랜만에 친구를 본 듯이 반갑다. 때로는 한 구절 명언이 가슴에 큰 울림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소설가 신경숙씨(49·사진)는 25일 고려대 도서관이 주최한 저자초청 강연회에 강연자로 나서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 뭔가 다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것이 내게는 책이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그는 손위 형제들이 빌려와 마룻바닥에 던져놓은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시절 어떤 책을 읽었고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는 대부분 가물거리지만 책과 함께 있었던 그 시간들만큼은 마음속에 덩어리져 남아 있다고 했다. 그는 “그때 ‘나도 언젠가는 이런 책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의 작품 <외딴방>의 모델이 된 고교시절 이야기도 들려줬다. 낮엔 일하고 밤엔 공부하는 산업체 특별반이었던 그는 담임교사의 조언을 통해 본격적으로 소설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필사하면서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신씨는 “그 작품(<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고교 1, 2학년이었던 내가 순식간에 이해하기 상당히 어려운 책이었지만 토막토막 사무치게 가슴으로 남았다”고 말했다. 당시 그가 일하던 회사는 심각한 노사분규를 겪고 있었다. 그는 “모든 생산이 중단된 컨베이어 벨트에 앉아 그 책을 필사하면서 내겐 너무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과해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대학에 입학하기 전 3개월은 작은 방에 틀어박혀 60권짜리 한국문학전집을 독파했다. 신씨는 “당시 친구도 없고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격이 내향적으로 변했는데 그걸 다 읽고 나니까 굉장히 든든한 텃밭 같은 게 마음안에 생긴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궁극적으론 ‘읽는 사람’을 넘어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떤 시간, 만남, 일들을 기록해놔야 요즘처럼 너무 쉽게 자기 자신조차 포기해버리는 순간과 대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쓰다가 보면 저절로 자기를 잊게 되고 아주 기나길게 느껴지는 좌절의 시간, 고통의 시간을 통과할 수 있는 힘이 내면에 자리잡게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