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드림은 업드림(UP-DREAM)입니다(마가14:34-36) 363장
사람의 삶을 보다 가치있고 복되게 하는데 꼭 있어야 할 여러 덕목들이 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과 의무에 충실하게 하는데 꼭 있어야 할 덕목도 있습니다. 그 덕목 중의 하나가 바로 “엎드림”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엎드림으로 하늘의 능력을 얻었으며,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왕상18:42) 기도하였으며, 다윗은 장로들과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대상21:16) 엎드렸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는 보잘 것 없는 어부 베드로에게도 엎드렸습니다.(행10:24-25) 이 엎드림으로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임하고, 성령이 역사하고, 세례가 베풀어지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도 엎드려 기도함으로 십자가를 감당하셨습니다. 성프란시스를 비롯한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 존 낙스, 루터, 조지 뮬러, 무디 등 수많은 믿음의 일군들은 엎드림의 기도를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신앙위인들의 삶과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신앙위인들의 삶을 보면 그것은 한결같이 “엎드림의 삶”을 살았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때로는 한숨짓고 가슴 아파하며 눈물지어야 했습니다. 때로는 동굴에 갇혀 있는 듯 캄캄함 속에서 울부짖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가‘엎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때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엎드릴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의 손에 쥐어 주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Up Dream(업드림)이었습니다. 엎드림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모세가 엎드린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민16:22) 엎드리면 하나님도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창17:3) 우리의 문제에 개입하시어 해결해 주십니다.
낮추고 엎드리면 패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모래 기둥으로 일어서는 사막에서 길을 찾아 앞으로 갈 수 있는 것은 낙타뿐입니다. 낙타는 뜨거운 모래폭풍이 휘몰아칠 때 가던 발을 멈춥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모래폭풍이 그치기를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거칠고 흉한 무릎이 거센 사막의 모래바람을 이겨낸 승리의 무릎이 되고, 목마름과 굶주림을 견뎌낸 생명의 무릎이 됩니다. 어렵고 힘든 광풍에서도, 고독하고 적막같은 어둠 속에서도 무거운 짐을 버텨내는 것은 바로 무릎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릎 꿇음이 일어섬의 시작입니다. 엎드림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업드림이 됩니다. 엎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릎꿇음이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고 우리의 죄된 모습들을 고백하는 것이요,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함이요 축복입니다.
엎드림은 자세를 낮춘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낮추어도 모든 것은 달라집니다. 조금만 낮추면 행복해지고, 자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높은 데 마음을 두는 사람에게는 원망이 많지만, 낮은 데 마음을 두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넘칩니다. 천양희 시인은‘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되어/ 무릎 꿇어야 보이는 작은 것들을 생각한다’고 노래합니다. 엎드리면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된다는 시인의 고백처럼 엎드리면 영롱한 이슬 속에 담긴 우주의 신비를 볼 수 있습니다. 엎드리면 작은 풀꽃 속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 솜씨를 보게 되고,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들의 눈물도 보입니다. 엎드리면 쓰러져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이 보이고, 엎드리면 엎드려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 낮은 데로 임하신 예수님의 눈길을 마주 대하게 됩니다. 천주교에서는 사제서품 때나 수도자 허원식 때 엎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엎드림은 무릎 꿇음보다도 낮은 자세입니다.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만큼 자세를 낮추어 겸손한 마음으로 헌신과 섬김의 자리에 있겠다는 서원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엎드릴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요, 복된 사람입니다.
홍사성의 <채근담>이란 책에“오래 엎드린 새가 높이 날고, 먼저 핀 꽃이 빨리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높이 날기 위해서는 그만큼 오래 엎드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일수록 오래 엎드리는 시간을 많이 가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요셉은 13년을 기다리면서 마침내 하나님이 사용하게 되었고, 모세는 출애굽을 하면서 40년을 광야에서 엎드리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큰 저수지일수록 오래 채워야합니다. 채울 사이도 없이 그저 내보내는 저수지는 쉽게 말라버립니다. 그러기에 엎드림은 기다림입니다. 우리의 모든 고난과 시련과 위기는 잠깐 지나가는 것입니다.(시30:5) 그러므로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면 들풀이 거센 바람이 지나가기까지 말없이 인내하면서 엎드려 기다리듯이 엎드려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처럼 답답하고 속상하고 고통스러운 사건 앞에서 엎드려 기다림으로 그들의 꿈과 비전을 세워갔습니다.
엎드림의 최고의 경배입니다. 경배란 하나님 임재의 영광 앞에 엎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엎드림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신앙적인 행위이며, 동시에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고개를 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주님을 경배하며 고개를 숙이고 땅에 엎드리게 됩니다. 엎드려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겸손한 심령의 자세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전적인 항복으로 절대 순종을 의미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곧 그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고 아버지께 순종하신 엎드림의 결과였던 것입니다.(마26:38-42,빌2:8) 엎드려 경배하는 것은 크신 하나님을 크신 하나님으로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엎드림은 크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고백과 인식이 있어야 바른 경배 즉, 엎드림이 가능합니다.
엎드림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항복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갈2:20)라고 고백하는 바울처럼 그리스도인의 죽음을 상징합니다.“나는 매일 죽는다”(고전15:31)는 바울의 선언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엎드림의 절정은 날마다 죽는 십자가의 체험과 고백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야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완벽하게 실패한 베드로는 그제서야 자신이 하염없이 약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 끝에서 베드로는 피하지 않고 엎드려 울었습니다. 엎드려 울었기에 다시 기회가 온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다시 살게 되었다(갈2:20)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모세의 영력은 언변이 아니라 엎드림에 있었습니다. 엘리야의 영력은 경력이 아니라 엎드림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영력은 권위가 아니라 엎드림에 있었습니다. 다윗과 베드로는 실패 속에서도 엎드림으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엎드림 속에 관계의 최고 테크닉이 있습니다. 엎드리면 주님의 십자가가 보입니다. 엎드리면 주님이 일으키십니다. 엎드림이 기적을 가져옵니다. 사순절 마지막 고난주간입니다. 엎드려 통곡할 때입니다. 지금은 지식이나 재능이나 관계나 기술이 필요한 때가 아닙니다. 오직 엎드려 통곡해야 합니다. 엎드릴 때 주님은 우리를 다시 세워(up dream)주십니다. 엎드리는 순간 그렇게 부활의 환희와 기쁨의 날은 밝아옵니다. (목포정명여자중학교 2011년 4월 18일 교직원예배:윤삼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