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림의 축복 (전도6:2) 410장
톨스토이의 단편들 중에“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동화 같은 소설이 있습니다. 러시아에 바흠이라는 한 농부가 있는데, 바흠은 평범하지만 별 욕심 없이 행복하게 살던 한 소작농이었습니다. 어느 날 바흠은 우연한 기회에 땅을 조금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땅을 얻은 이후에는 이상하게도 욕심이 자꾸 생겨 땅을 계속 넓혀가야만 성이 차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흠은 어떤 지방에서 땅을 싸게 판다는 말을 듣고 그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땅을 파는 방식이 대단히 독특했는데, 그것은 하루 종일 자기 발로 걸은 만큼의 땅을 주는 것인데 다만 해가 지기 전에 그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무효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흠은 이 계약에 동의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 땅을 얻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계속 걷다보니 욕심도 생기고 자기 앞에 있는 땅들일수록 더 비옥하고 탐스럽게 보여서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반환점을 돌아야 했을 시점인데도 바흠은 욕심 때문에 계속 앞으로 나갔습니다. 마음이 급해 바흠은 장화도 옷도 벗고 조금이라도 멀리 가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해가 막 떨어질 무렵에 출발점으로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지만 바흠은 그만 심장이 터져 그 자리에 피를 토하며 죽고 말았습니다. 바흠의 하인이 그를 땅에 묻었는데 그 땅은 겨우 2m가 조금 넘는 규모의 땅이었습니다. 정작 그에게는 단지 한 평 남짓의 땅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일본에서 67세의 나이로 숨진 미야우찌라는 거지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집을 정리했는데 다락방에는 5천만원이 예금된 통장과 1억 7천만원 가량의 주식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헐벗고 굶주리며 모으고 쌓는 일만 했습니다. 어쩌다가 쌀을 사다먹고 남이 주는 야채 부스러기를 날로 먹고, 가끔 끓일 것이 생기면 주워온 나무 조각을 때서 끓여 먹었다고 합니다. 돈이 아까워 목욕은 기껏해야 일년에 한 두 번 했고,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하여 값싼 음식만 골라 먹은 결과 영양실조와 동맥 경화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매일 입버릇처럼 '나는 200세까지 살 것이다'고 했다고 합니다. 넓은 집을 가졌다고 아름다운 가정이 약속되는 것은 아니고, 좋은 침대를 가졌다고 평안한 잠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건강을 가졌다고, 물질을 많이 가졌다고, 많이 쌓아두었다고 행복이 보장되는 것 역시 아닙니다. 소유와 누림은 이렇게 다릅니다. 많이 가졌지만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적게 가졌지만 충분히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우리가 살던 시대보다 더 많은 것을 먹고 누리며 살고 있지만 우리 시대보다 더 많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음을 봅니다. 누림의 복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복을 얻지 못하면 그저 그럴 뿐입니다. 이 땅에서 땀 흘리며 수고하는 모든 일들이 그 뿐이라면, 그건 정말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룬 것을 누리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이룸의 축복만 받으면 온전한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누림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룬 것을 사는 동안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사울은 이룸의 축복은 받았습니다. 잃은 나귀를 찾아다니는 평범한 청년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 행복하게 누리지 못했습니다. 왕의 축복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습니다. 일평생 시기와 질투의 마음으로 다윗을 쫓아다녔습니다. 늘 불안한 마음에 살다가 악신이 들었습니다. 결국 불레셋 나라에게 나라는 망하고 자신과 아들은 전쟁터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짓는 이룸의 축복을 받았지만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회개하며 그 성전에서 여호와를 통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누림의 축복은 맛보지 못하였습니다. 성전을 지어 놓고 이방신을 섬기며 세상 연락에 빠져 버렸습니다. 초대 교회 일곱 집사님들은 이룸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스데반과 빌립만 누림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브로고로와 니가노르, 디몬과 바메나는 임직식 때 이름만 나오고 그 후 아무런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니골라는 나중에 초대 교회의 이단인 니골라 당을 만들었습니다. 차라리 직분을 받지 않은 만 못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도 권력을 얻고 부를 얻고 명예를 얻고 직분을 얻지만 누림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룸의 축복도 받아야 하지만 누림의 축복도 아울러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많은 것을 얻고 이루었습니다. 믿는 자에게 주는 구원과 영생의 복, 구하면 주시는 응답의 복, 죄를 고백하면 얻는 사함의 복, 세상과 어둠을 이기는 승리의 복,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는 동행의 복, 하늘의 유업을 물려받는 상속의 복 등 수없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건강을 얻고, 가정을 얻고, 이웃을 얻고, 일터도 얻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이미 주었습니다. 기쁨을 이미 주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기에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주어진 것을 누릴 줄 아는 것도 인생의 멋이고, 삶의 맛입니다. 좋은 아내가 주어졌는데 아내를 누리지 못하고 불나비처럼 밤거리를 헤매는 사람, 건강한 남편을 누리지 못하고 날마다 이웃집 남자의 풍요로움을 부러워하는 아내, 자식들 주어졌는데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보며 늘 짜증을 내며 자식들을 스트레스의 원흉으로 삼은 부모 그들은 진정 누림의 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누리지 못하면 그것은 진정한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룸의 축복에서 멈추지 말고 누림의 축복으로 행복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누림의 축복을 받으려면 예외자로 살지 말고 참여자로 살아야 합니다. 법궤가 들어오는 것을 방관하며 비판하는 미갈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방관자,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누림은 양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리는 자의 자세와 태도에 있습니다. 많이 있어야 누리고, 적게 있으면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물론 모든 사회생활을 하는데도 구경꾼으로 산다면 누림의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배를 구경하면 예배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지 못하면 회복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합니다. 운동경기나 영화는 구경꾼이 필요하지만 예배는 구경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참여자가 되어 함께 누려야 합니다. 예배의 참여자, 봉사의 참여자, 전도의 참여자, 섬김의 참여자, 교육의 참여자, 축복의 참여자, 은혜의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왕 같은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그의 백성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고객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함께 누리는‘누리꾼’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제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누림은 사라지기 전에 누려야 합니다.“있을 때 잘해”라는 유행가처럼 맛을 누릴 만한 감각이 있을 때 맛을 누려야 합니다. 나아가 내가 이룬 것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루어 놓은 것도 누릴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가장 고상한 누림은 누림의 은혜를 깨닫고 베푸는 베품의 누림입니다. 내가 누린 것으로 남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절망으로부터 희망을 누린 사람들은 그 누림을 다른 사람도 눌릴 수 있도록 베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누림 중 가장 고귀한 누림이며 축복입니다. (목포정명여중 2010년 8월 29일 교직원예배:윤삼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