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4계절을 주셨습니다. 봄에는 얼었던 대지가 훈풍으로 풀리며, 따뜻한 햇살 사이로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납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짐승들이 기지개를 펴며 새로운 날을 시작하는 희망의 계절입니다. 여름에는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싱그러운 녹음이 우거지고, 온갖 꽃들이 피고 집니다. 내리쬐는 불볕 아래 오곡이 익어가며,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하는 계절입니다. 사람들은 산이나 바다를 찾아 심신을 단련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어느새 가을이 오고 사람들은 울긋불긋한 단풍의 절정과 함께 들판에 무르익은 곡식을 창고에 모아 들이느라고 바쁩니다. 황금 들판을 이룬 가을은 우리에게 설레임과 열매를 거두는 넉넉함과 풍요로움을 가지게 하는 계절입니다. 그러나 그 감상도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앙상한 가지마다 마지막 남은 잎새가 떨어지고, 길가에 떨어진 낙엽을 다 쓸기도 전에 싸늘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기 시작하면서 포근함을 그립게 하고, 오만한 사람들의 어깨를 움츠리게 만드는 계절입니다. 벌써 산간 지방에는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머잖아 본격적인 추위가 우리 곁에 올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에 이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어서 세월이 흘러가듯이 우리의 인생도 계절의 변화와 함께 흘러가고 있습니다. 영아의 때가 있고, 유아의 때가 있습니다. 철부지 소년소녀의 때가 있고, 청년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장년의 때가 있고, 노년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년 사계절은 순서가 있고 질서 정연하게 오고 가지만 우리의 인생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여기에 인생의 아쉬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어떠한 인생도 반드시 겨울이 온다는 것입니다. 고사에 비육지탄( 肉之嘆)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가 조조에게 쫓겨 유포에게 도망을 가서 10여년 동안 신세를 지며 허송세월만 보내던, 어느 날 문득 자기의 발을 보니 발 안쪽 복숭아 뼈에 살이 쪄 있는 것을 보고 한 없이 한 숨을 쉬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허송세월의 한탄을 비육지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너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때가 가깝기 전 너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전12:1)고 합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너무나 많습니다. 난방 준비는 물론 김장도 준비해야 할 것이며, 겨울옷도 꺼내어 손질을 해놓아야 하겠고, 보일러 청소도 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준비들입니다. 분명히 겨울은 우리의 사정을 봐주지도 않고, 우리의 형편을 이해해주지도 않고, 용서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년도 낙엽이 지는 지도 모를 정도로 바쁜 가운데 그만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거리거리마다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나목(裸木)의 단풍잎들이 운치를 더해주는 요즘, 계절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색조, 또 그 속에 흐르는 분위기를 통해, 굳이 서로 말하지 않아도, 인생을 살아온 만큼 들을 수 있는 언어가 누구에게나 있으리란 생각을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스치는 바람의 차가움은 우리들로 하여금 풀어진 가슴을 다시 여미게 하고, 오히려 그 차가움 때문에 따뜻한 커피와 정겨운 만남이 더욱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차가운 계절의 냉기로 인한 움츠림은 우리들에게 헛된 흥분과 들뜸을 몰아내고 사색의 세계로, 내면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찾아 온 사색과 침묵에 친숙해지다 보면 어느새 생각은 숙성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고, 마침내 우리의 영혼 속에서 생명의 언어들이 깊은 우물에서 시원한 생수를 건져 올리듯이 흘러나오는 환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가을이 겨울에게 그 마지막 여운으로 흩어진 낙엽과 바람을 선물로 안겨주고 가는 것처럼, 가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먼저는 성숙했던 모든 잎들을 다 떨어뜨린 나목처럼, 거짓된 위선의 나를 벗어버리고 있는 그대로 진실한 나의 모습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인생의 한계를 가르쳐 줍니다. 권력과 재물과 힘의 한계 그리고 명성의 한계를 조용한 웅변으로 가르쳐 주며, 떠나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시들어 가는 풀밭에 팔베개를 베고 누워서 파랗게 갠 하늘을 고요히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까닭 없이 차분해지고 고독해지며 인생이란 것, 산다는 것이 과연 뭔가 새삼 물음을 던지게 합니다. 가을은 평소에 놓치기 쉬운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귀 기울이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조금씩 철이 들어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 계절의 변화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겨울에 즈음하여 겨울나는 법을 이야기하며,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북풍이 불어올 터인데 봄이 오는 그날까지 버티어 나갈 신앙의 활력을 가슴속에 비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묵상을 심화하며 기도의 샘을 더 깊이 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스스로의 참회와 결단의 준비가 있어야 할 때입니다.
겨울나무는 한 겨울에 벌거숭이로 서 있습니다. 낙엽을 모두 떨어뜨려야 겨울을 거뜬히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겨울에는 수분이 작기에 낙엽을 떨어뜨려 수분의 흡수를 막아줍니다. 만약 그 단풍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지 못하면 낙엽수를 사랑하는 주인은 그 나뭇잎을 따 주어야합니다. 그래야 혹독한 겨울을 지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가을이 되어 햇빛이 작아지고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잎을 하나하나 떨어뜨리며 겨울을 스스로 준비합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는 낙엽들은 자기를 잘라버린 나무의 뿌리를 감싸주어, 겨울의 추위를 녹여줍니다. 참으로 신비한 것은 낙엽이 자기를 자르는 아픔을 통하여 더 찬란한 모습으로 세상에 새롭게 태어납니다. 저도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아름답고 더 성숙한 나를 가꾸기 위하여, 잘라야 할 것을 자르고 싶습니다. 인생의 겨울을 이길 수 있도록 말입니다. 문득, 저도 당당하고 늠름하게 서있는 저 알몸의 겨울나무를 닮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추운 겨울에도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고 기도하는 나무처럼 겨울을 지내고 싶습니다.
우리들은 7가지 겨울을 맞고 있습니다. 첫째, 계절적 겨울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추운 겨울입니다. 둘째, 환경의 겨울입니다. 그야말로 사방으로 꽉 막혀 희망이 없을 것 같은 절망의 계절입니다. 셋째, 건강의 겨울입니다. 원치 않는 질병과 사고로 인하여 인생의 절박한 상황입니다. 넷째, 나이의 겨울입니다. 인생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 했는데 노년기의 삶을 살고있는 인생의 겨울입니다. 다섯째, 인간관계의 겨울입니다. 이해하고, 용서하지 못해 마음 깊은 곳에 응어리가 쌓인 관계의 겨울입니다. 여섯째, 기회의 겨울입니다. 전도서 기자의 말대로 만사에는 때가 있습니다. 기회는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베풀 기회, 위로해야 할 기회, 배워야 할 기회, 전도해야 할 기회 등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잃어버린 기회는 영영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명의 기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생명의 겨울이 오기 전에 영생을 준비하고, 인생의 밤이 오기 전에 천국을 준비해야 합니다. 어떤 겨울을 맞이하느냐에 따라 준비하는 과정과 방법도 달라질 것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인생의 겨울, 인생의 노년기는 우리 모두의 미래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 시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시간이 갑자기 닥치기 전에 비전가족 여러분과 우리 모두는 겨울을 준비하며 깨어있어 영혼을 가꿀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남자에게 네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첫째 아내는 너무나 사랑하여서 늘 함께 하였고, 둘째 아내는 힘들여 얻은 아내였기에 가장 귀하게 여기고, 셋째 아내는 늘 자신을 즐겁게 하였기 때문에 늘 곁에 두었고, 넷째 아내는 별로 자신에게 해준 것이 없어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남자가 먼길을 떠나며, 아내들에게 함께 가자고 하지만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모두 거절하고 맙니다. 그러나 평소에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넷째 아내는 기꺼이 승낙하고 함께 동행합니다. 여기에서 먼길을 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첫째 아내는 육신을 말하는데, 육신은 결코 죽음이상 더 이상 가지 못합니다. 둘째 아내는 재물로, 귀하게 얻었지만 재물 역시 결코 죽음에 이르기까지 함께 하지 못합니다. 셋째 아내는 가까운 친구를 말합니다. 친구도 죽음의 자리에서는 다 떨어지게 돼 있습니다. 마지막 넷째 아내는 믿음을 말합니다. 평상시에 그 믿음이 그렇게 소중한지는 몰랐지만 이 믿음만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함께 동행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기적은 늘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갈채와 환호도 오랫동안 내 곁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의 계절에 무엇이 중요한지 자명해졌습니다.
오리를 키우는 농부가 몹시 추운 어느 날 저녁, 오리가 보이지 않자 여기 저기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작은 물구덩이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오리를 불렀으나 꿈적하지 않는 것입니다. 평소 같으면 주인의 음성을 듣고 바로 다가올텐데 그 날은 아무리 불러도 가만히 있어서 주인이 오리들이 있는 곳으로 가보았더니 모두 언 물에 박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리는 추위를 잘 타지 않기 때문에 좋은 자리를 잡고 가만히 있으면 물이 얼어도 이것을 모르고 있다가 언 물에 박혀 버려 끝내 죽고 마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자리가 좋다고 눌러 앉아 있는 사람은 오리처럼 얼어죽고 말 것입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구르몽의 '낙엽'이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가을이 마저 가기 전에,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도 낙엽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낙엽은 천지조화를 압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압니다. 한 닢 두 닢 떨어지는 은행잎에서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의 부르시는 소리를 듣습니다.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딤후4:21)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갈 곳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부르는 손길이 있습니다. 인생의 창문들이 꼭꼭 닫히고, 우리들의 만남이 꽁꽁 얼어붙은 그 매운 겨울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그 순간에도 '어서 오라'고 부르는 손짓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땅거미가 드리우고 있습니다. 가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앞에 동장군이 성큼 다가섭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하여 겨울 외투와 성경을 빨리 가지고 오라고 한 말씀(딤후 4:13)처럼 인생의 겨울을 잘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준비는 미리 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을 때에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온전한 준비만이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김용택 님의 시를 소개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있거든 겨울이 오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바람 불고 낙엽 지면 그 사람 어디론가 가버릴 테니까요.
용서할 사람 있거든 겨울이 오기 전에 용서한다고 말하세요.
가을 가고 겨울 오면 그 사람 기다리다 지쳐 원망할 테니까요.
감사할 사람 있거든 겨울이 오기 전에 감사하다고 말하세요.
눈오고 해 바뀌면 그 사람 어느 틈엔가 잊혀질 테니까요.
그리워하는 사람 있거든 겨울이 오기 전에 그리웠다 고백하고 찾아가세요.
세월 가고 주름지면 그 사람도 당신을 잊을 테니까요. (김용택 '겨울이 오기 전에')
(목포극동방송 2004년 11월 23일 비전칼럼 원고)
* 신앙의 연말정산
누가 말하길 대부분의 사람들은 1월이 되면 부푼 꿈을 안고 한해를 시작하는 이상주의자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6월쯤 되면 현실주의자가 되고, 12월에는 결국 아무 것도 이룬 게 없어 허무주의자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정말 웃는 자다."라고 말했으며, 전도서 기자도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고"(전7:8) 말씀하십니다. 올해도 한해가 저물었습니다. 비전가족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아직 꿈과 희망이 넘쳐나는 이상주의자로 남아 있을 것만 같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처음 시작할 때와 지금은 많은 차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꼭 등장하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연말정산입니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세금을 줄여보려고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심지어는 세금공제를 더 받으려고 불법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정산해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연말정산은 단순히 세금 공제 혜택을 받기 위한 일이어서는 안됩니다. 지난 1년동안 지출과 수입을 분석해 봄으로서 자신의 관심과 경영능력이 얼마나 영적이었는지 점검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인생의 연말정산 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성취했느냐, 즉 우리의 업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우리의 삶의 방식과 자세를 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독교인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결산을 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결산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연말정산에 몇 가지 기준이 있듯이 신앙의 연말정산도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우리는 참다운 인생의 목표를 바로 세울 수 있고, 인생의 목표를 바로 세운 자만이 한해의 목표도 바로 세울 수 있고, 연말정산도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보는 각도와 기준에 따라서 그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신앙의 연말결산의 표준을 함께 생각하면서 한해동안의 삶과 신앙을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첫째, 종말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까? 한해의 끝이 있듯, 인생의 종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바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각 개인의 종말인 죽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27:1)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 곧, 이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다는 것을 늘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오늘을 헛되게 살지 아니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허황된 꿈에 사로잡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나를 부르실지 모른다라는 종말의식에 투철하다면 순간순간 겸손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기를 다짐할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종말을 의식하며 산다면, 그 종말의 끝 날에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어 심판과 상급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타락하고 어려운 세상에 함께 동화되지 않고 더욱 거룩하게 살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을 결산하면서 개인적이든 세상적이든 투철한 종말의식 속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올바른 신앙의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까? 바른 가치관이 있어야 삶의 방법과 우선 순위가 분명해집니다.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되느냐?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는가? 육신보다 영혼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삶입니다. 최근 한국 청소년들의 가치관 변화에 대한 조사결과가 발표되었는데, 25년전 조사에서는 '마음의 평화'와 '가책없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 가치관으로 조사되었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그것들이 순위 밖으로 추락했으며 '편안한 생활'과 '여유있는 생활'이 가장 중요한 가치관으로 등극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맑은 꿈을 먹고 자라야 할 청소년들조차 마음이 좀 불편하고 양심에 가책이 되어도 외적으로 편안하고 여유있는 생활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주저 없이 택하겠다는 심히 염려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예술 박물관에는 에드가 앨런포의 흉상이 있습니다. 그는 유명한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흉상 아래에 씌어있는 글귀가 박물관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줍니다. "재능은 뛰어났으나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은 더욱 비참하였다" 오늘 우리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과연 내 묘비에는 어떻게 쓰여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은 무엇을 위해, 누구와 함께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가치관의 선언이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만 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얼마나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았습니까? 모름지기 사람은 진실한 만큼 성실하고 또 그만큼 행복하게 되어있습니다. 미국의 브라이언 킹 박사는 인간의 심리를 깊이 연구하여 거짓말을 분석하였습니다. 성인은 보통 일주일에 13번 정도의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분류해 보면 첫째는 속이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남을 속입니다. 동기부터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짓말입니다. 둘째로 감상적인 거짓말이 있습니다. 내가 느낀 감상을 사실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대개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사람의 경우가 이 경우입니다. 셋째로 과장하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은데 조금씩 보태어서 이야기합니다. 그 보탠 만큼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넷째, 둘러대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남한테 비난받기 싫어서, 또는 방해하기 위하여 순간적으로 둘러댑니다. 다섯째로 비밀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 있습니다. 회개할 시간에 회개하지 못하고 비밀을 감추려 드니 자연히 거짓말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가장 큰 죄는 둘러대는 것이었습니다. 핑계하는 사람은 성실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넷째, 얼마나 기도하고 감사하며 사셨습니까? 어쩌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행복하였는가' '얼마나 기뻐하였는가'가 중요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얼마나 감사했는가의 문제입니다. 감사가 성공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행복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의 파이프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돈은 잃었으나 지혜를 얻을 수가 있고, 명예를 잃었으나 인격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는 줄고 원망과 불평만이 내 마음을 지배하였다면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하지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축복합니다, 이 말에 익숙해지는 것은 오늘의 행복을 잡는 비결입니다. 또한 기도하지 않고 살았다면 그것은 살아있음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상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고 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인생이 값지고 존귀한 인생이 됩니다.
다섯째, 얼마나 친절을 베풀었습니까? 어느 누구에게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친절을 베푸는 것은 사랑입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13:2)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길손을 대접한 것이 하나님을 대접하게 되어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데 직접 주시지 않고 축복의 통로 즉, 다른 사람을 통해서 주실 때가 많습니다. 친절은 어려운 사람에 대한 관심이며, 사랑과 봉사와 섬김입니다. 윗사람이나 가진 사람에게만 하는 봉사와 친절은 위선이며 아부일 뿐입니다. 사랑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 표현하는 것이고, 말보다는 친절한 행동으로 우선 표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곧 사랑은 명사가 아니고 동사인 것입니다. 말로 사랑한다는 것 보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손을 내밀어 잡아주는 행동이 더 필요합니다.
여섯째, 함께 했던 사람들을 기억하십니까? 장성숙씨는 '그래도 사람이 좋다'에서 "함께일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우리 삶의 모든 기쁨과 슬픔도 결국은 사람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은 중심이 아닌 조건들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살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 했던 사람들 이름 하나 하나를 따뜻한 마음으로 기억하고 칭찬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결산합니다.(롬16:1-23)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 속에 장점을 보고, 소중히 여기고, 가치를 인정해주고, 존귀하게 여기며, 감사한 마음으로 따뜻하게 대했습니다. 가족과 친족을 비롯해 친구와 동료, 동네 사람 등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주님의 사랑을 기울이고, 수고를 해서 나의 인생 결산 장부를 써야 합니다. 우리도 수첩을 꺼내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놓고 세어 봅시다. 그 중 지금 당장 내 인생 결산으로 하나님께 보고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누구라도 한 번씩은 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무엇보다 복음으로 얻은 영혼들이 넘쳐나는 풍성한 결산서를 하나님께 내 놓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훌륭한 화가는 언제 붓을 거두어야 하는 줄 알고, 훌륭한 지휘자는 어떻게 연주를 마감해야 하는 줄 안다고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도 어떻게 정리하고 마감하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한해 동안 정말 선한 청지기의 자세로서 이웃과 하나님께 성실하고 충실하게 섬기고 봉사했는지를 사도 바울처럼 신앙의 대차 대조표를 만들어가며 연말 결산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결산 때는 바울처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딤후 4:7-8)고 당당히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목포극동방송 2004년 12월 21일 비전칼럼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