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부르는 대로 (창2:19) 80장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모든 것의 시작이 되시는 것처럼, 사람은 그 이름을 붙이며 시작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후, 그것들을 아담에게로 이끌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저것들에게 아담은 어떠한 이름을 붙일까 궁금하셨습니다. 아담은 보여지는 것들마다, 자기에게 오는 것들마다 이름을 붙여주었고, 아담이 붙인 모든 명칭들은 그대로 그것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세상의 모든 것은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하늘과 구름, 땅과 바다, 하다 못해 작은 들풀과 돌멩이 하나에도 이름이 있습니다. 물론 아담에 의해 지어진(창2:19)것이 대부분이지만 이름은 일반적으로 각자의 특성에 따라 지어집니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에 각자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이름이 있다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실체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실체는 이름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고, 규정되어지거나 구분되어지며 어떤 틀을 갖게 하고, 서로 다른 이름과의 관계가 형성되어지며, 사람에게 있어서는 인격체로 존중받고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의미는 그렇게 불러진다는 것이고, 불려짐으로서 가치를 갖게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아담만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세상 모든 것들을 향하여 이름을 붙이고 삽니다. 부모는 자식의 이름을 짓고, 회사에서는 상품의 이름을 짓고, 연구소에서는 새로운 물질의 이름을 짓고, 탐험가들은 새로 발견한 지역의 이름을 짓습니다. 사람이 이름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축복이요 선물입니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불려지는 대로, 이름대로 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사람은 보통명사의 이름이 아니라 개체 하나하나 즉 모두에게 고유한 각자의 이름이 있습니다. 금순이라는 이름을 지으면 굳세게 되고, 예쁜이라 지으면 예쁘게 됩니다. 날마다의 '날'에도 이름을 붙여줄 수 있습니다. 오늘을 2008년 11월 3일이라고 부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생일로, 누군가에게는 결혼기념일로, 어떤 이에게는 추도일로 불러지거나 기억됩니다. 그리고 그날이 추도일이면 슬퍼하며 고인을 생각하고, 입학식이면 새로운 일에 대하여 소망을 갖고, 발렌타인데이라고 하면 초콜릿을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합니다. 또 특정한 사물에도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끼는 옷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붙인다면 그 옷을 입을 때마다 사랑을 떠올릴 것이고, 아끼던 책에 친구의 이름을 붙이면 그 책을 읽을 때마다 우정을 떠올릴 것이고, 또는 항상 지니고 다니는 물건에 ‘사랑해’란 이름을 붙인다면 항상 ‘사랑해’라고 말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이름을 붙여주는 그때부터 그것들은 단지 사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의미를 부여받은 나만의 소중한 것이 되어, 내가 그것들을 보고 만지고 들을 때마다 그것들에 붙여준 이름들을 기억해내고 행복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 이름이 주는 힘 때문에 생겨납니다. 이렇게 붙여지는 이름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 것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우리 주변의 많은 것들이 숨쉬고, 말하고, 생각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고 의미를 부여해 줌으로써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름을 부르고, 붙이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어떠한 상황을 만나게 되면 그것에 따라서 이름을 붙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화가 나거나 열 받는 일이 생기면 누군가를 향해 도둑놈이라고도 하고, 강아지라고도 하며, 사기꾼이라고도 합니다. 반대로 자신을 어려움에서 도와주거나 칭찬하고 배려해주면 착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모두 자기편에서 생각하고 판단하여 이름을 붙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으로부터 절대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도둑놈은 영원한 도둑놈이고, 착한 사람은 늘 착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이름 붙이는 대로 되는 말과 이름의 속성 그리고 그 이름이 갖는 힘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이름 붙이고 또 그것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는 뜻입니다. 남편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보호함과 강인함을, 아내라는 이름을 붙이면 사랑스러움과 따뜻함을 느낍니다. 교사란 이름을 붙이면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려 하고, 학생이라 붙여지면 배우려고 하고, 자녀라는 이름을 통해서는 귀여움, 사랑, 소망 등 온갖 좋은 것을 붙여주고 세상의 주인공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면서 이렇게 이름붙이며 살기도 하지만 이름 붙여진대로 살아야할 의무도 있고, 이름 붙여진 대로 대우도 해야 합니다. 처음 이름은 다른 무엇과 구분하여 특정 지어주는 표지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름에 붙어 있는 수식어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집사와 장로로, 회사에서는 사장과 사원으로, 또 학교에서는 선생님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붙여진 이름들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 못하게도 합니다. 대통령, 장관 등의 이름은 우리를 한없이 영광스럽게 높여 주기도 하지만, 피의자, 패배자와 같은 이름은 우리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듭니다. 같은 이름인데도 다른 가치가 부여되는 것, 같은 이름에 대하여도 다른 평가가 내려지는 것,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행동이나 성품 그리고 사물의 질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또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교사는 교사로서의 대우를 받아야 하고, 교사로서의 책임과 의무도 다해야 합니다. 사장 대우는 하지 않으면서 무슨 사장이 저래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처사입니다.
그렇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는 언제든지 좋지 않은 평가나 이름을 바꿀수 있습니다. 새로운 이름을 붙이거나 얻으면 이름이 바뀌기 전과 후는 어떤 식으로든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시몬은 베드로가 되었고, 사울은 바울이 되었으며,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캐시어스 클레이는 무하마드 알리가 되었고, 루앨 신도는 카림 압둘 자바가 되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역할이나 지위나 지혜가 자랐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혹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고 합니다. 무엇엔가 이름을 붙여주면 더 실재하고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까닭입니다. 박노해 시인(본명 박기평)의 필명은 ‘노동해방’의 약자이고, 유한양행 창업주인 유일한 박사(본명 유일형)의 경우 미국에서 자랄 때 한국인임을 잊지 말자는 마음에서 이름을 ‘일한一韓’으로 개명하였습니다. 이름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삶이 변하듯 이름 또한 변할 수도 있고 덧붙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보다 새로운 이름으로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불려지는 이름이 특별하면 특별해집니다. 꼭 개명이 아니라도 호나 별칭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말입니다. 나는 노래를 잘 하는 사람! 나는 정직한 사람! 나는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세요. 이름 붙이는 그대로 됩니다. 누군가 우리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을 불러주길 기다리기 전에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빛깔과 향기를 담은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좋습니다.
'백스터 효과'란 말이 있습니다. 나무를 심어놓고 12제자의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나무들은 잘 성장하는데 가룟유다의 이름이 붙은 나무는 시름시름 죽어갔습니다. 그것은 지나가는 사람마다 저주한 때문이라고 합니다. 클리브 백스터라는 식물학자는 이에 대해 연구를 합니다. 한사람은 장미를 사랑하여 아끼고 보살핍니다. 다른 한 사람은 장미를 학대하여 담배 연기를 쐬게 하고 때로는 뜨거운 커피도 붓기도 하는데, 어느 날 우연히 보니까 누가 들어오느냐에 따라 장미의 잎사귀가 미세한 반응을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검류계를 연결하여 그래프를 그리게 해 보았더니 누가 들어오느냐에 따라 잎의 반응이 다른 것입니다. 요컨대 식물도 감정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연구자의 이름을 따서 백스터 연구라고 부릅니다. 식물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 가르치는 교사나 부모는 우리에게 맡겨진 아이들에게 좋은 이름을 붙여주고 또 불러주어야 하고 나아가 그렇게 대우해야 합니다. 바라건데 우리 모두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듯 우리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며 사랑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는대로 우리가 불러주는대로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목포정명여자중학교 2008년 11월 3일 교직원예배:윤삼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