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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보리밟기

물음표와 느낌표 2008. 3. 18. 21:57

영혼의 보리밟기 (로마8:17-18)149장

 

 

  사순절 마지막 기간인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주간은 잘 아는 대로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주님의 고난과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기 위해 광야 길을 걷는 영혼의 보리밟기입니다. 보리를 심으면 겨울에 보리밟기를 합니다. 난지(暖地)에서의 보리밟기는 웃자람 방지에 효과가 있으며, 한지(寒地)에서는 주로 서릿발 피해 등의 내한성(耐寒性)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것은 갓 난 보리 싹을 그대로 두면 보리가 평균 100알쯤 열리지만 그 싹을 밟으면 나중에는 더 강한 싹이 나와 평균 400알 정도의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보리밟기는 보리처럼 밟히고 또 밟히어, 으깬 감자처럼 내가 없어지고 죽어지는 체험입니다. 또한 망치에게 맞으면서 깊게 깊게 박혀 어둠 속에 자신을 숨기는 못처럼 순종과 겸손을 배우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이 보리의 연한 순 같이 밟히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전 비료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는 무, 채소, 가지, 오이, 고추며 고구마를 캐던 밭에 냄새나고 더러운 분뇨를 뿌렸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냄새 때문에 코를 틀어막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밭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더러운 밭이 되어버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더럽다고 생각했던 그 똥 밭은 비옥한 땅이 되어서 더 많은 결실을 거두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땅은 불순물을 스스로 정화하고 분해하여 오히려 유용한 성분을 흡수하는 자정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밟히고, 으깨지고, 두들겨 맞고,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고, 오물로 더렵혀지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답답한 일을 당해도 그러한  것들은 오히려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 인격의 싹을 피게 하는 쟁기와 같고, 또한 모나고 다듬어지지 못한 우리의 못된 근성을 두드려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와 같습니다.

 

 

  다이아몬드와 연필심을 만드는데 쓰이는 흑연은 원소가 같은 카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흑연이 되고, 어떤 것은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보석이 됩니다. 그 이유는 다이아몬드가 투명하고 아름다운 금강이 되기까지 많은 고통을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깊은 곳에서 높은 온도와 압력을 받은 카본은 다이아몬드가 되고, 그렇지 않은 카본은 흑연이 됩니다. 또한 다이아몬드의 아름다움은 총 58면으로 이뤄진 다양한 면에서 광채를 발할 때 절정을 이룹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가 이토록 다양한 면을 갖기까지는 투박하고 거친 원석이 잘리고, 깎이고, 갈려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정확히 말해 반사하는 아름다움을 뿜어 낼 수 있습니다. 아놀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북해 청어잡이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북해에서 청어를 잡아 런던까지 가지고 오면 청어들은 거의가 다 죽어버려 제 값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 어부만이 청어를 싱싱하게 산 채로 운반해서 많은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결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그는 청어를 넣은 통에 천적인 메기를 한 마리씩 집어넣었습니다. 메기는 청어를 잡아먹는데 런던까지 오는 동안 기껏해야 몇 마리 잡아먹을 뿐 어느 정도 이상은 배가 불러서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청어들은 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쳐 다니기 때문에 싱싱한 채로 런던까지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는 게 힘들고 고달파도 불편할 뿐이지, 그게 불행은 아닙니다. 편안함이 곧 평안은 아니듯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크리스천 그리고 보배로운 영성을 원한다면 쉬운 길을 택하기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영성 훈련의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참된 영성은 고통과 아픔과 갈등을 통과함으로 만들어지고, 인생은 짓밟힐수록 강해지는 까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주간은 영혼의 보리밟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풍요로움 속에서 지식과 물질의 비료만 너무 많이 주어서 웃자라고만 있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농부의 지혜를 본받아 금식과 절제의 생활로 우리의 영혼도 보리밟기에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영혼의 보리밟기는 우리의 필요와 욕구는 잠시 멈추고, 십자가 앞으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으면 부활의 영광도 없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십자가 지신 예수를 생각하며 감격해하고 그 사실을 믿을 뿐, 우리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갈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에의 동참'이 없는 '고난에의 믿음'만이 있다는 말입니다. '고난에의 동참'이란 광야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광야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풍족하지 않을 뿐 아니라, 추위와 더위와 사나운 맹수의 위험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주리게 하시다가 알지도 못하는 만나를 주신 것은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줄 알게 하려는 것(신8:3)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보리밟기는 자연스레 경건과 절제의 생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경건은 외형적 거룩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절제는 소비문화 속에서 우리의 욕망을 제어하는 훈련입니다. 그러기에 일부러 가끔은 금식을 통해 인간의 본능을 억제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때로 애매하게 환난과 핍박을 받아도 변명하기 보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해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과 여유를 가져야합니다. 또한 우리의 연약함으로 견디기 힘든 아픔이 있을지라도 '아~ 보리밟기하는구나' 하며 울면서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보리는 밟아주면 바로 쓰러져 짓밟혀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잎 텃던 곳에 상처가 생겨서 상처에 수분 함유가 많아지고, 생리적으로 내한성이 높아지고, 뿌리도 더 깊게 내리게 되어 잘 밟힌 보리는 봄에 풍성한 이삭을 맺게 됩니다. 영국 속담에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험한 파도가 훌륭한 뱃사공을 만들고, 영혼의 보리밟기가 참 그리스도인을 만듭니다. 그처럼 우리도 짓밟혀 죽을 것 같지만 보리밟기가 끝나면 영혼의 이삭은 더욱 알차게 영글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 맺는 삶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보리 뿌리가 흙에 밀착되도록 보리밟기하듯, 내 영혼과 믿음의 뿌리도 주님께 밀착되도록 느슨해진 나의 아랫배를 꼭꼭 밟아 남은 고난주간 고랑고랑을 착실히 다져나가 비로소 알찬 부활의 열매를 거두고 싶습니다. "주리게 하시다가 알지 못하는 만나를 주신 것은 낮추시고 시험하사 마침내 복을 주려 하심이라"(신8:16)

(2008년 3월 17일 목포정명여자중학교 교직원예배 설교;윤삼열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