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익는 계절, 시 읽는 계절(시편23:1-6) 40장
가을입니다. 가을이면 귀가 아프도록 듣는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독서의 계절! 그런데 실상은 정반대라고 합니다. 실제로 가을은 도서 판매량이 평균을 한참 밑돕니다. 오죽하면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란 건 출판계에서 불황을 타개하려고 지어낸 말'이란 우스개 소리가 떠돌 정도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맑고 푸른 가을하늘과 울긋불긋 아름답게 물들어 가는 대자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대자연의 서사시가 문밖에 있는데 사람들의 인위적이고 현학적인 글들이 눈에 들어올 리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을은 시가 익어 가는 '시 익는 계절', 대자연의 시를 음미하는 '시 읽는 계절'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시(詩)라는 말은 말씀言과 절寺로 이루어져있어서 '사원의 언어'(言+寺)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사원의 언어란 정신적 수행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언어로서, 언어의 정결함 내지 청정함을 그 본래성으로 하고 있기에 미적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시가 지향하고 있는 언어의 성소에 예배하는 일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시를 쓴다고 하는 것은 먼저 절대자에 대한 경외함이 우선하고 그것은 또 신앙으로 고백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를 읽는 것은 절대자를 만나는 경험이며 신앙인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시장의 언어가 아니라 사원의 언어라는 것인데, 시장의 언어가 시끄러움이라면 사원의 언어는 침묵입니다. 시끄러움과 요란함에서 벗어나 조용한 침묵의 숲으로 드는 것, 그것이 시를 읽는 의미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어쩌면 시라는 것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을 그렇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인가를 길고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대번 시의 대상이 되는 것의 본질에 닿아 그 본질을 노래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시를 읽는다는 것은 마음이 맑아지는 일이지 싶습니다. 둔했던 마음, 무뎌지고 헝클어졌던 마음을 맑게 정돈하는 일이지요. 어수선하고 번잡했던 일상에 중심을 회복하는 일일 것입니다. 분주했던 발걸음을 멈추고서 내 주변과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일일 테고요. 시를 읽는 것을 별난 사람들이 갖는 고상한 취미나 사춘기 청소년들의 전유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시를 읽어 무뎌졌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세상을 따뜻하고 의미 있게 볼 수 있는 맑은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원이나 버스에서 시를 읽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성선 시인이 쓴 '별을 보며'라는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이 됩니다.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고작 네 줄, 어려울 것도 없는 짤막한 글을 읽는데 왜 그리 눈물겹던지요. 우리가 잃어버린 마음이 무엇인지를 나직한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마음까지를 우울하게 만드는 심한 황사나 스모그를 짜증 섞인 눈으로 바라보거나, 계획한 일정이나 행사에 지장이 없을까를 확인하기 위해 하늘을 바라볼 뿐, 나를 성찰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기가 힘든 세상입니다. 어느 새 우리들은 땅의 일도 벅차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아예 잊고 살아가곤 합니다. 시인은 하늘을 바라보기에는 부끄러울 뿐인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더러워진 마음을 모르거나 감추지 않습니다. 행여 더럽혀진 마음으로 별과 하늘을 쳐다보아 별과 하늘이 자기 자신 때문에 더럽혀질까 조심을 합니다. 마음이 맑은 이만이 가질 수 있는 티없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 우리 다 잃어버렸지 싶어서, 내 눈길 한 번에 세상 어떻게 달라지는 것인지 우린 너무도 모르며 살고 있지 싶어서 문득 부끄럽고 마음이 떨립니다.
이렇듯 우리들도 가을과 함께 익어 가는, 아니 가을이 읊조리는 대자연의 서사시를 함께 읽어보시지 않겠습니까? 가끔씩 형광등 대신 촛불을 켜고 별과 달의 노래를 음미하면 시인의 감성이 느껴지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시편의 기록이 그러하듯 하늘과 땅, 산과 계곡 그리고 바다와 들판이 그려내는 하나님의 시어들을 접하다 보면 비록 시의 감동은 멀리서 느리게 올지 모르나,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우리의 잔이 넘쳐나게 할 것입니다.
(목포정명여자중학교 2007년 10월 15일 교직원예배:윤삼열 목사-이 설교는 한희철목사의 글을 참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