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l-aging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추구하는 문화 코드를 웰빙이라고 부르듯, 가을처럼 고운 빛으로 천하지 않게 곱게 늙어 가는 것을 웰에이징(well-aging 건강하게 늙기, 곱게 늙기)이라고 부릅니다. 왜, 뜬금없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에서 '늙음'을 이야기하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실 지 모릅니다. 하지만 듣기 싫고,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 같지만 결코 우리와 뗄 수 없고, 엄밀하게 말하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곧 늙어 가는 것이고, 통전적(통시적)입장에서 젊음과 늙음은 한 직선 상에 놓여있기에 젊음과 늙음을 따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박혜란은 「나이 듦에 대하여」란 책에서 "산다는 것은 늙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늙음이란 젊음이 스타카토로 끝나는 어느 날 별개의 삶처럼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노전생활'이란 말이 없는 것처럼 '노후생활'이란 말도 틀린 말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젊음과 늙음은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늙음을 바로 이해하거나 미리 생각하지 않고서는 젊음 또한 바르게 살수 없습니다.
누구나 나이를 먹습니다. 방송을 듣는 청소년 여러분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사람들은 훗날 이야기 그야말로 노후대책으로서만 늙음 또는 나이 듦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이 들어가는 것과 늙음을 다르게 생각합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가다가 어느 순간에 늙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늙어 가는 것을 노망이나 치매 또는 죽어 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늙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늙음을 낡음으로 보고 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면 병들고 그러다 죽습니다. 그렇듯 나이 든다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긴 하지만 나이가 드는 것은 한편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으며, 살아온 시간만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좀 더 많이 있는 것을 보면 나이 듦이란 즐겁고 조금은 설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탈리아 작가 파베제(C. Pavese)는 "늙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은 영원히 아이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이 들고 늙지 않는다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나이 들어가면서 인생경험과 함께 다양성은 축적되고, 삶은 여유로와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이 듦과 늙음을 이해하고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노년의 삶은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삶의 연장선에 있다고 하는 통시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 모두는 태어남과 동시에 나이를 먹어가며 늙어가고 있다는 현실을 알아야합니다. 이 말은 겁을 주려는 게 아니라 나이 듦 또는 늙음을 우리 스스로의 문제로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것을 거부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늙음을 낡음으로 이해하여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거나, 나이 들어가는 사람을 나와 상관없는 문제로 도외시함으로서 사회문제를 야기 시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본인들 스스로도 늙음을 훗날의 문제로 생각하여 나중으로 미루다 결국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지 못하고 맙니다.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일수록, 그리고 늙음을 훗날의 문제로 생각할수록 세월이 지나갈 때마다 매력의 빛이 희미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이 들어가며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깨달아도 어른들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아울러 많은 문제를 예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기왕 늙어 가는 것이라면 곱게 나이 들어가는 법을 배우고, 노년의 삶을 미리 예측함으로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나무가 늙을수록 품(品)이 나는 것처럼 곱게 늙어 가는 분들을 만나면 참 멋있어 보입니다. 이들은 늙지만 낡지 않기 때문입니다. 늙음과 낡음은 한 획 차이지만 삶에서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 늙음이 곧 낡음이라면 그 사람의 인생은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하지만 늙더라도 낡지 않는다면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 삶은 나날이 새롭습니다. 사실 몸은 늙어도 얼마든지 마음과 인격은 더욱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나이 들수록 더 원숙한 삶이 펼쳐지고 더 농익은 깨우침이 다가옵니다. 멋모르고 날뛰는 청년의 무례함보다는 고운 자태로 거듭 태어나는 중년의 삶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원숙함 때문일 것입니다. 곱게 늙어간다는 것은 겉은 낡아도 속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나이는 한 번 두 번 칠을 더할 때마다 빛과 윤기를 더해 가는 옻칠과 같습니다. 실제로 나이를 거듭하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지혜와 기쁨이 많습니다. 그 기쁨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멋진 삶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늙는 것이 아니라 꿈과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젊음의 매력은 눈을 놀라게 하지만, 나이 듦의 미덕은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심리학에는 발달과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에릭슨은 청소년기에는 자아정체성이란 과업이 있고, 노년기에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회고하면서 나름대로 남은 인생과 죽음의 의미를 정리해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합니다. 또한 어떤 분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타인과의 화해가 중요한 과제라고도 합니다. 이처럼 각각의 나이에 걸맞는 과제를 미리 알고 준비한다면 우리의 남은 생이 두려움이 아니라 숙제를 통해 더욱 성숙해져 가는 학생들처럼 날마다의 삶이 활기차고 설레며 아름답게 익어갈 것입니다. 교통사고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측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운전 실력이 좋아도 갑자기 다가오는 위험에는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운전교육을 받을 때 "별 일 없겠지 하는 것보다 있을지도 모른다"(だろう運轉を しないで, かもしれない運轉を しましょう)는 운전을 하라고 배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운전을 하다보면 사고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혹 나타날지 모를 돌발상황을 예견하며 방어운전을 하면 사고를 방지할 수 있는 것처럼, 다가올 단계마다의 문제와 과제를 미리 알고 있다면 나이 듦과 늙음도 두려움 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Well-aging"(곱게 늙어가기) 할 수 있을까요?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어떤 사람이 늙어서도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한 인간으로서 대접받을 수 있도록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제한된 육체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몸부림치고 발버둥쳐도 나이 들면 육신은 쇠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 듦과 늙음은 결코 파멸과 어둠의 길이 아닙니다. '자기를 잃어버리면 희망도 없다'는 말이 있듯이 나이가 들수록 자존감을 갖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탈무드에서는 여러 부정적인 생각들, 즉 '두려움과 노여움'이 늙음을 재촉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Well-aging"의 기본은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소망과 영생을 가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영원한 삶이 있는 사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매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나이가 많아지면서 오히려 왕성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곱게 그리고 우아하고 지혜롭게 늙어 가는 것을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를 사려 깊으나 시무룩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남에게 도움을 주되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란 17세기 어느 수녀의 기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그럼에도 육신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육체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안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이 필요하며, 함께 대화하며 깊은 정을 나누기 위해 행복한 가정은 물론 평생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젊게 살기 위해서는 폭넓은 감각을 가져야하는데 음악이나 영화 취미생활을 하는 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은 무엇보다 '일과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사랑할 사람이 없어지고, 할 일이 없어질 때 빨리 늙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이 들수록 자원봉사 활동이나 적극적인 사회참여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사랑하는 능력을 키워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이야말로 행복하게 나이 드는 비결이라고 소노 아야코는 그의 책 「행복하게 나이 드는 비결」이란 책에서 말합니다. 어디선가 읽은 글에 인생을 즐겁게 살려면 세 개의 주머니 즉, 첫째는 이루고 싶은 꿈을 담아 놓는 주머니, 둘째는 하루하루를 즐겁게 지내는 재미 주머니, 셋째는 비상금 주머니 등 세 개의 주머니를 준비하라고 했더군요. 과연 그럴까요? 물론 꿈도 재미도 돈도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꿈을 담는 주머니엔 하늘의 소망을 담고, 재미 주머니엔 영적인 즐거움인 말씀과 묵상을 통한 기쁨을 담고, 비상금 주머니엔 언제든지 내어놓을 수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의 열매 등을 담아 놓는 것이 영원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곱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이 듦이나 늙음은 먼 훗날의 이야기도 아니고, 병도 아닙니다. 결코 나중 생각할 일이나 따로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입니다. 늙음이란 우리의 삶 속에서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이며, 단지 젊음과는 다른 의미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리신 기력이 쇠하지 않는 축복을 우리에게도 내려주시길 소망합니다.
(목포극동방송 2005년 11월 15일 비전칼럼)